한국일보

‘눈물병’ 과 아내의 대담성

2018-09-01 (토) 조성내 컬럼비아 의대 임상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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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한국영화를 보면서 자주 운다. 울고 있는 아내를 볼 때마다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또 울어?”, “비싼 밥 먹고 울기는 왜 울지?” 하고 핀잔을 주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눈물병'에 걸리고 말았다. 눈물병은 의학명이 아니다. 내가 그냥 ‘눈물병’이라고 이름을 붙여본 것뿐이다.

영화를 보고 있다가 슬픈 장면이 나오면 나도 몰래 눈물이 나온다. 아내 앞에서 운다는 게 창피하다. 하지만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다. 영화만 보다가 눈물이 나오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 슬픈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온다. 어떤 때는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하고 있는 도중, 감동이 되던가, 혹은 슬프다고 생각되는 대목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주위를 돌아보니 부끄러워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나처럼 ‘눈물병’에 걸려 울고 있는 노인들을 많이 보았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다가 엉엉 울어버리는 노인도 보았다. 의사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그게 바로 호르몬 때문이란다. 남자나 여자는 남성호르몬(Testosterone)과 여성호르몬(Estrogen)을 갖고 있다. 남자는 젊었을 때 남성호르몬이 아주 많아서 근육도 단단하고 성격도 남성다워진다.


늙어질수록 남성 호르몬은 줄어든다. 남성 안에 있던 여성호르몬은 원래 적은 양이었지만 줄어들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다. 남성호르몬이 줄어드니까 비례적으로 여성호르몬이 많아지게 된다. 여성호르몬이 노인을 여성처럼 감정에 예민해지고, 눈물을 흘리게끔 감상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여성들은 어떤가? 늙어질수록 여성 호르몬이 줄어든다. 비례적으로 남성호르몬의 비율이 많아진다. 할머니들은 남성처럼 대담해지는 경향이 있다. 늙은 부부를 자세히 관찰해보라. 무슨 힘든 일이 닥치면, 남편은 뒤로 슬슬 물러서고, 그 대신 아내가 앞에 나와서 집안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젊었을 적 아내는 나한테 순종을 잘 했었다. 내가 하자고 하면 무엇이든 잘 따라 했었다. 내가 무엇인가 해달라고 부탁을 하면 거절 없이 부탁을 다 들어주었다. 그런데 요사이는 다르다. 판이하게 다르다. 내가 무언가 부탁을 하면 아내가 큰소리치면서 대들고 달려든다. “왜 나한테 시켜? 나한테 시키지 말고 당신이 하란 말야, 당신한테 매일 밥 해주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또 나한테 이 것 해라 저 것 해라 하고 일을 시켜? 안 돼. 지금부터는 나한테 일을 시키지 말고, 당신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해요.” 그러고는 나를 구박한다.

아내의 ‘대담성’을 말하려고 하다 보니, 마치 아내가 항상 남편한테 대들고 달려드는 나쁜 여자인 것처럼 묘사되고 말았다. 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아내는 늘 상냥하고 친절하다. 하지만 갑작스레 나에게 대들 때가 있는데, 이때는 ‘이 사람이 내 아내였었나?’ 하고 의심해본 적이 한두 번 있었다.

늙어지면 남자는 ‘눈물병’에 걸리고 여자는 대담해지고···, 사실 여자들이 남편을 위해서 일평생 밥 해주고 시중도 들어왔으니 마지막 인생길에 여자들이 남편한테 큰소리치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조성내 컬럼비아 의대 임상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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