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 73돌 특별기획- 독립군 후손에 듣는다 ④이상백 목사 손녀 이경자 여사

이상백 목사의 손녀 이경자 여사가 23일 할아버지가 펼쳤던 독립운동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이영식 등과 대구 서문시장 독립만세운동 주도
집에서 태극기 수백장 만들어 군중들에 나눠줘
일제 경찰 미행으로 상해^하와이 등 떠돌다 해방후 돌아와
“손녀들에게 다정다감한 편은 아니었지만 조국을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투철한 삶을 살다 가신 분입니다.”
23일 맨하탄의 한 식당에서 만난 이경자 여사(76)는 독립 운동가인 할아버지 이상백 목사를 이렇게 회고했다.
1886년 8월15일 출생한 이상백 선생은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인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으로 돌아와 인동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펼쳤다.
그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상백 목사는 경북 대구 서문 시장의 독립만세 운동을 열기로 결심하고, 3월7일 대구 계성학교 학생인 이영식과 만나 독립선언서 20매를 만들어 함께 독립 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계획했다.
이어 이상백 목사는 자신의 집에서 이영식 등과 만나 태극기를 수 백장을 만든 뒤 장독에 숨겨뒀다가 3월12일 진평동 뒷산 기슭에 300여 명의 군중을 모아놓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상백 목사는 당시 군중 앞에 서서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조국이 멀지 않은 장래에 독립할 것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계속해서 힘차게 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상백 목사는 이후 13일부터 15일까지 사흘간 4차례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법정에 회부된 이상백 목사는 그해 4월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에도 일제 경찰의 감시와 미행으로 고통을 받던 이상백 목사는 중국 상해와 만주에 이어 하와이로 도피생활을 이어가다 조국이 해방된 뒤에야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향인 칠곡군 인동면으로 내려가 목사 생활을 이어간 이상백 목사는 1965년 9월17일 79세의 나이에 작고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경자 여사는 “독립운동이 곧 삶이었던 할아버지와의 많은 추억은 없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자기 소신이 매우 뚜렷하셨다”며 “조국을 위해 살아온 할아버지가 옳은 일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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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홍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