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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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천년처럼…’

2018-08-21 (화)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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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선한 아침이다. 며칠 전만 해도 한 여름이었는데. 어느 새 가을이 다가온 듯하다. 폭염이 내리쬐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기온이 뚝 떨어진 여름의 끝자락이다. 올 한해도 어느 덧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길목에 접어든 셈이다. 참으로 시간은 마술사의 위력을 발휘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 같이 주어진다. 일정한 속도로 흐른다. 시간은 나이의 속도로 간다. 10대는 시속 10마일, 20대는 20마일...그러다 50, 60, 70대를 넘어서면 인생의 종착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 한다. 살아온 삶과 살아갈 날의 길이에 따라 느낌은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남은 생이 짧을수록 세월의 속도는 더 빠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시간의 느낌도 달라지는 법이다.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일 때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좋아하는 스포츠나 취미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역시 매한가지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너무 짧아서 아쉬울 정도다. 이와 달리, 무엇인가를 기다릴 때의 시간은 너무 더디게 간다. 공이 안 맞을 때의 골프 라운딩은 너무 지루하다. 힘들고 고달픈 상황에 처했을 때는 시간의 속도가 무척 길게 느껴진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시간은 게으름을 피우다가도 재빠르게 움직이곤 한다.


고대 그리스어(헬라어)로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는 두 가지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크로노스는 단순하게 흘러가는 ‘시간’이다. 지구가 공전과 자전을 거듭하면서 결정되는 시간을 의미한다. 매일 한 번씩 어김없이 낮과 밤이 찾아오는, 매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반복되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연속해 흘러가는 시간이다.

쉽게 표현하면, 시간을 뜻하는 ‘TIME'으로 이해하면 된다. 물리적, 양적인 시간이며 특징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일상의 삶에서 경험하는 그냥 흘러가는 시간을 말한다. 크로노스는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평하고 객관적인 시간개념인 셈이다.

카이로스는 인간의 목적의식이 개입된 시간이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접목된 정신적이며 주관적인 시간을 뜻한다. 시간은 비록 흘러가지만,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 시간을 말함이다. 결정적 ‘시각’, 결정적 ‘순간’, ‘기회’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기회를 뜻하는 ‘CHANCE'와 일맥상통한다.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결정과 관련된 시간개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는 카이로스 시간개념을 담고 있다. 광고 문구에 등장하는 ’순간‘과 ’나이‘란 표현이 그렇다. 순간‘은 자신의 삶을 변혁시키는 새로운 시간적 의미를 표출하는 카이로스 시간을 의미한다. ’나이‘란 표현도 그러하다. 무의미한 시간을 초월하여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카이로스 시간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무상하고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흐르는 세월은 어찌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순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소중한 이유다. 어떤 의미의 시간이던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더욱 귀중하다. 시간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야 말로 천양지차라 할 수 있다.

크로노스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사는 목적이 자기에게 있다. 그저 하루를 육체의 편안함과 욕망추구로 흘려보낸다. 아무리 성공을 했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 반드시 인생무상과 삶의 허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카이로스 시간관을 갖고 사는 사람은 다르다. 순간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다. 높은 이상과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세월은 새로운 시작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하루하루 가치 있는 꿈을 실천하며 살고 있으니 매일 매일이 긴 세월을 살아가는 삶이다. 카이로스 적인 삶은 하루를 살더라도 천년의 무게로 살아내는 지혜인 것이다.

사람은 천년만년 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를 천년만큼 길고 값있게 살 수는 있다. 하루를 천년처럼 살려면,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시간’을, 가치를 ‘쌓아가는 시간’으로 활용하면 될 일이다.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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