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해방의 노래

2018-08-13 (월)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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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깊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새 봄이 왔네>로 시작하는 ‘해방의 노래’는 8.15 광복절이면 언제나 부르던 국민가요였다. 8월 15일, ‘해방 기념일’은 일명 광복절이라고도 부른다. 광복(光復)은 빛이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36년간에 걸친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의 압제와 탄압을 암흑기로 보고 조선 사람들이 거기에서 풀려났다는 뜻으로 광복이란 말을 고른 것이다.

미국 감리교 선교부가 보관하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조선총독부는 조선에 주재하고 있던 선교사 대표들을 불러 간담회를 가졌다. 그 목적은 조선인들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끈질긴 움직임을 무마시키기 위한 방안을 찾자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선교사들은 담대하게 발언하였다. “잘 먹고 편하게 살게 해 준다고 해도 조선인들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오직 원하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눌림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신생국가 아메리카의 발전상을 관찰하여 늙어가는 유럽 나라들을 깨우치고자 당대 최고의 철학자 프랑스의 토케빌레 교수(Alexis De Tocqueville)가 약 100년 전의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의 보고서는 미국의 경제나 정치 상황이 아니라 당시 미국교회의 강단(설교)를 주목하고 있었다. “미국의 설교자들은 선(Goodness)과 정의(Righteousness)와 해방(Liberation)을 외치고 있었다. 과연 이 나라는 희망이 있다.”


한국교회의 설교 강단도 반성할 점이 없는가? 개인 구원과 교회 부흥의 울타리 속에서만 굼틀거리고 있지나 않은가? 사랑과 봉사의 깃발을 높이 들고 교회는 세상 속으로 힘차게 뻗어나가야 한다(Outreaching). 그것이 사도행전에 소개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다.

Religious Report지가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새 희망, 새로운 일에 대한 희망을 조사하였다. 기독교인들의 반응은 “그런 것은 과거에 다 해 보았다.” “교회는 사회와 달라야 한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등 부정적인 반응이었다고 한다. 교회는 눈을 넓게 뜨고 인간해방을 외치는 수준의 높은 안목을 가져야 한다.

예수는 자기의 사명을 이렇게 천명하였다.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 한 마디로 예수는 눌린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기 위하여 왔다는 것이다. ‘해방자 예수’의 이미지가 뚜렷하게 부각된 말씀이다. ‘눌린 자’란 각종 욕심에 억눌린 인간들을 가리킨다. 그들을 욕정의 노예로부터 해방하려는 것이 예수의 사명이었다.

한국인들은 오랜 동안 독재자들 밑에 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뇌되어 <누군가 강하고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잘못된 신화를 머릿속에 새기게 되었다. 그것은 민주주의 이념에 역행하는 소위 ‘허위의식’이다. 기미년(己未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거리에 뛰쳐나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3.1만세 운동처럼 나와 모두를 귀중하게 여기는 천민사상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미안마의 수 키 여사는 거의 평생을 가택연금 생활을 하였는데 기자 회견이 허락된 첫 마디가 “민주주의는 경제 발전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확립함으로써 이룩될 수 있다.”고 하였다. 거의 평생인 27년 동안을 교도소에서 지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도 “내가 사는 목적은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서이다.”고 천명하였다. 미국의 전 국무장관 메들린 울브라이트도 “평화 수립이란 곧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확보하는 것이다.”고 선포하였다.

인간 해방! 그것이 인류의 지향점이며 천국 건설이다. ‘더 높이, 더 힘차게!(altius, fortius!)’는 올림픽의 표어일 뿐이 아니라 인류의 표어가 되어야 한다.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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