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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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와 6.25

2018-08-10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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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5일은 광복 73주년이다. 광복은 빛(光), 즉 일제로부터 우리의 주권을 되찾은(復) 날이다. 그러나 국내 정치적 혼란이 본격 시작된 날이다. 해방 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미 군정청에 등록된 정당수가 54개, 1년 후에는 정당수가 300여개인데다 좌파세력과 우파세력이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

이 와중에 만주벌판에 쓰러진 독립투사, 태평양 전선에서 사망한 학도병, 일제에 맞서다 퇴학당하고 전국을 유랑하던 학생, 장터에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선량한 일반 민중들은 잊혀졌다.

서로 자기가 나랏일 하겠다는 다툼 속에 여운형, 김구, 장덕수 등이 해방된 조국에서 암살당했다.


그러다가 1950년 6월25일 동족상잔의 전쟁이 발발했다. 즉각 유엔안전보장위원회는 공산군의 무력침략을 저지하고자 유엔군을 파견했는데 미국이 제일먼저 해군과 공군을 한국전선에 내보냈다. 이어 유엔 16개국의 젊은이들이 먼 이국땅 전장으로 왔다.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 7월27일 휴전까지 3년 이상 치러진 6.25에서 미군 전사자는 5만4,000여명, 부상자는 10만 명이었다.

지난 1일 북한에서 한국전쟁 미군 전사자 유해 55구가 65년 만에 돌아왔다. 하와이주 오아후섬 진주만 히캄 공군기지에 안착했고 봉환식이 열렸다. 미군 병사들이 성조기로 덮은 금속관을 운반하자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미군 인도태평양사령부 사령관이 경례로 예의를 표하는 사진을 보았다.

이들의 나이는 몇 살일까? 작게는 16살부터 대부분 10대 후반이거나 20대일 것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나이에 포탄에 맞거나 하늘에서 떨어져 스러져 간 이들의 한번 뿐인 삶, 그리고 그 가족들을 떠올려 보았다.

평생 아들을 기다리다 지쳐서 오래 전에 고인이 된 부모들, 신혼의 아내나 형제자매들은 세상을 떠났거나 백발노인이 되었을 것이고 어린 자녀가 있었다면 아버지 기억이 전혀 없는 7순, 8순 노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번에 모국으로 돌아온 유해는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의 DNA 신원확인절차가 뉴저지로, 오하이오로, 앨라배마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장진호 전투지역, 운산 및 청천전투지역, 비무장 지대 등 주요격전지와 압록강 인근 전쟁포로 수용소가 있던 지역 등에 아직 5,000여구의 미군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미 고위층과 현역장성 아들이 142명 참전하여 35명이 전사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윌튼 워커 미8군 사령관은 가장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미 24단에 아들 샘 워커 대위를 파견했다. 그 자신이 사고로 죽었고 낙동강 전장에서 싸우던 아들은 훗날 육군대장이 되었다.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은 외아들 지미 밴플리트가 B29 폭격기를 타고 북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실종되자 아들의 수색을 못하게 했다.

필드 해리스 제1항공사단 사단장의 아들 윌리엄 해리슨 중령은 장진호 전투에서 실종됐고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의 외아들 윌리엄 클라스 소령은 큰 부상으로 전역했으나 얼마 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아들 존 아이젠하워 중령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자 ‘포로로 잡히느니 전사가 낫다’고 했다.

군의 최고 통치권자 본인은 물론 아들까지 헐벗고 가난한 나라로 쾌히 달려가 대한민국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먼 나라에 5만4,000명의 아들을 묻었고 10만 명의 아들이 부상당한 미 국민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한다. 지도자급 한국인 중에는 여전히 권력을 축재 수단으로 남용하고 자녀에 관한한 공과 사를 구별 못하는 이들이 많다.

재미한인들은 6.25참전 미 재향군인들을 초청하여 고마움을 표하는 자리를 자주 마련하고 있다. 더불어 우리는 6.25를 통해 본 ‘노블레스 오블리주(부, 권력, 명성을 지닌 지도층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모범적으로 보여야 한다)’를 배워야 한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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