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일랜드 출신 맥그린치 신부의 삶 화제
▶ 1954년 도착 후 “가난 퇴출”축산업 선도, 방직공장·신협 설립 등 빈자들과 한평생
지난해 아일랜드 대통령상 수상자로 선정된 맥그린치 신부(오른쪽)가 앙엘 오도노휴 주한 아일랜드 대사(왼쪽)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연합>
패트릭 J. 맥그린치 신부가 23일 90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60여년 전 제주도에 도착해 목축업 기반을 다지고 사회복지시설을 설립하는 등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낯선 땅 제주도에 정착해 수많은 기적을 일궈낸 여정이었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이지만 한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임피제’라는 한국 이름을 사랑했다. 돼지 사육을 통해 주민의 경제적 자립을 도와 ‘푸른 눈의 돼지신부’라는 애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1928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1954년 4월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로 제주 한림본당에 부임했다.
그가 제주에 도착한 당시 주민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선교활동을 하러 왔지만 한림에는 성당 건물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인천에서 새끼를 밴 요크셔 돼지 한 마리를 구입해 가져왔다. 이 돼지는 연간 돼지 3만 마리를 생산하는 동양 최대 양돈목장의 기초가 됐다. 또 4-H 클럽을 조직하고 가축은행을 만들어 주민들과 함께 축산업을 시작했고, 1961년 축산업 교육과 실습 등을 목적으로 성이시돌 목장(성이시돌 중앙실습목장)을 세웠다.
목초를 개발해 소도 기르기 시작했다. 농민들에게 사료를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도록 사료공장도 가동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기술은 모자랐지만 주민들이 협동심과 성실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한국의 축산업을 선도할 정도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하곤 했다.
목장 사업을 기반으로 1,300여 명의 여성을 고용하는 한림수직도 설립했다. 1950년대 말 가난한 집의 한 소녀 신자가 돈을 벌러 부산에 갔다가 숨진 비극이 계기가 됐다. 한림수직에서는 여성들이 직조 기술을 배워 양털로 제품을 만들어냈다. 고품질의 다양한 제품이 생산돼 한때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밀려들 정도로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제주도에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신협) 설립을 추진한 것도 맥그린치 신부였다. 농민들이 계를 들었다가 돈을 떼이거나 높은 사채 이자에 허덕이는 것을 지켜보던 그는 안정적으로 돈을 맡기거나 빌릴 수 있어야 농축산업도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1962년 제주도 최초이자 농촌 지역 1호, 전국에서도 7번째인 한림신협이 탄생할 수 있었다.
또 다양한 사업으로 생긴 수익금으로는 병원·양로원·요양원·유치원·노인대학·청소년수련시설 등 사회복지시설을 설립했다. 주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선 이후에는 호스피스 사업에 집중했다. 그는 죽음을 앞둔 가난한 병자들이 사회적 무관심과 지원부족으로 비참한 임종을 겪게 되는 것을 일종의 차별로 여겼다. 2002년 3월 성이시돌 병원을 호스피스 중심의 성이시돌 복지의원으로 재개원했다. 성이시돌 복지의원은 후원회원들의 도움과 이시돌농촌사업개발협회 지원으로 전액 무료로 운영되고 있다.
맥그린치 신부는 지난해 2월 18일 그의 업적을 기록한 평전 발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과거 한림성당을 짓던 때를 언급하며 자신이 제주에서 경험한 첫번째 기적을 회고했다. 당시 한림 앞바다에 좌초된 미국 화물선에서 성당을 짓기 위한 목재를 얻어 수 킬로미터를 옮겨야 했는데, 신자뿐 아니라 주민 수백명이 아무런 조건 없이 자발적으로 힘을 보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제주도민 가운데 3,000명만 1,000원, 3,000원, 5,000원씩만 성이시돌 복지의원을 후원한다면 호스피스 병동의 재정 걱정은 전혀 없을 것”이라며 또 한 번 기적을 만들어 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해 적십자상, 제주도문화상 등을 받았고 1973년 제주도 명예도민증을 받았다. 2014년에는 한국에서 반세기 넘게 선교와 사회사업에 몸 바친 공을 인정받아 고국인 아일랜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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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원 종교전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