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애틀 교육이야기

2018-03-14 (수) 대니엘 홍 편집위원
크게 작게

▶ 한가지 죄

“학교는 교육적으로, 감성적으로, 도덕적으로 성장하고 배우는 곳이다. 그런 학교에서 수업거부를 하며 총기규제 요구 시위를 벌이거나 거리로 뛰쳐나가 집회에 참석하는 학생들을 용납하지 않겠다”라고 텍사스 휴스턴 소재 니드빌 학군의 교육감이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교육감은 덧붙였다. “삶은 선택이다. 모든 선택에는 좋든 싫든 결과가 따른다. 만일 학생들이 시위에 참석한다면 3일 정학 처분을 내릴 것이다.”

이에 맞서 대학들은 “고등학생들이여, 총기규제 집회에 참석했다고 정학 당할까 걱정하지 말고 시위를 벌여라. 우리 대학에서 입학사정을 할 때 지원자가 그런 일로 정학을 당했다면 절대로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 라고 발표했다.

무엇이 교육감과 대학의 관점 차이를 만들었을까.
교육감은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 <연을 쫓는 아이>에서 아버지 바바가 아들 아미르에게 말한 ‘한가지 죄’를 저질렀다.


“이 세상에는 한가지 죄 밖에 없어, 딱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도둑질이지. 다른 모든 죄는 도둑질의 변형일 뿐이야. 네가 사람을 죽이면 그것은 한 생명을 훔치는 것이야. 또한, 죽은 자의 아내될 권리를 훔친 것이고, 죽은 자의 자식들로부터 아버지를 훔치는 것이야. 네가 거짓말을 하면 그것은 진실을 알아야 할 다른 사람의 권리를 훔치는 것이야.”

19세기에 시작된 학교의 전통적 개념, 즉 학교는 권위에 순종하는 착한 시민을 키워내는 장소라는 고정관념으로 교육감은 학생들의 집회와 의사 표현의 자유와 권리를 도둑질한 것이다.

이에 비해 대학은 “우리는 잉여인간을 원치 않는다”라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잉여인간이란 단어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러시아의 지식인, 귀족들은 자신들이 지닌 지식과 능력으로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하여 제 역할을 감당하며 사회를 개혁하기 보다, 무관심ㆍ무료함ㆍ냉소에 빠져 방관자 생활을 했다. 그런 상황을 러시아 작가들이 소설을 통해 그렸고 사회참여를 회피하는 자를 잉여인간으로 불렀다. 이 맥락에서 잉여의 뜻은 잉여 농산물처럼 풍족해서 남아도는 뜻이 아니라, 있으나 없으나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는 맹장처럼 “자신의 역할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푸시킨의 소설 <오네긴>에서 명문 학교 출신 귀족 오네긴의 책장에는 계몽주의 책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의 서재는 아이디어 생산과 그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옮기는 산실 역할을 하는 곳이 아니라, 오네긴이 하루에도 몇 시간씩 헤어스타일ㆍ패션ㆍ얼굴 단장에 신경을 쓰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오네긴에게 잉여인간 타이틀이 붙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나폴레옹 전쟁을 겪은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나폴레옹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 이후 “해봐야 별 수 없다”라는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져 지식인들은 자신의 서재에 묻혀 책이나 읽자 라는 태도를 보이며 사회가 돌아가는 일에 방관자로 전락한 것이다.

대학은 바로 그런 방관자를 원치 않는다. 모든 것을 점수로 평가하는 학교에서 자신의 끼를

발휘하거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봐야 별 수 없다 라는 현실에 부딪힌 학생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저항이나 탈출이 불가능한 학교 울타리에 갇힌 느낌을 받은 학생은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무기력해지고 모든 것을 강 건너 불 보듯 하게 된다.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굴러가는 학교 시스템에서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 채 방관자로 남는다. 자신의 권리를 도둑질 당하여 잉여인간으로 전락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학은 고등학생의 시위 참여를 격려했다.

<대니엘 홍 편집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