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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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드라마 끄고

2018-01-16 (화) 나 리/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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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이다. 결혼한 지 20주년이고 이제 아들은 고등학생이 된다.
올 한해를 어떻게 보내야 좋은 기억으로 남을지 작년 12월부터 고민 끝에 그날그날 가족들에게 좋은 말 하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하루를 감사하게 사는 법을 연습하는 2018년을 보내기로 했다.

나는 굉장히 빨리 결혼했다. 일찍 결혼해서 좋았다. 내 편이 생기고 영원한 인생의 동반자이자 친구와 인생을 같이 할 수 있어 나에겐 25세에 이미 유부녀가 되었다는 후회가 없었다. 하지만 30세가 되었을 때, 미국에서 유학생 부인의 삶이 지칠 때, 미국 오기 위해 접은 나의 사회 생활이 그리워 질 때, 집에서 멍하니 남편을 기다리면서 나의 미래가 안 보일 때, 결혼의 기대감이 다 사라졌을 때, 결혼으로 잃어버린 20대가 너무나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우연히 '올드 미스 다이어리'라는 드라마를 봤다. 난 30살이 인생의 끝이라 생각해 서른살 뒤의 삶에 대해서 생각을 접고 그저 옛 추억만 곱씹고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 속의 30살 올드 미스들은 각자의 삶을 즐기며 잘 살았고, 30살 이후의 삶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다시 힘을 내서 인생을 설계했다. 미국 RN시험도 통과하고, 아이도 낳고, 미국 대학교도 등록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엔 아직도 잃어버린 20대에 대해 그리움이 지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 생활은 여전히 외롭고 미국 땅에 유일한 가족인 남편은 본인의 힘든 공부와 불안한 미래로 자기 돌보기에 급급했다.

다시 드라마를 켰다. 이번엔 드라마를 보면서 과거로 돌아가 선택을 바꿨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상상했다. 드라마를 통해 현재의 삶을 버리고 미래와 과거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미국에서 산 시간의 추억이 없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드라마를 통해 살아온 추억은 많다. 현재의 삶을 벗어나 항상 과거에 또는 미래에 살았기에 새해가 와도 아무런 감흥도 기대도 없었다. 날마다 억지로 살았던 것 같다.

다행이다. 2018년,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현재를 살면서 과거로 도망가는 건 주어진 오늘을 후회하는 과거로 만드는 행위 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드라마를 끄고 매일 매일 ‘오늘 하루’를 꾹꾹 즈려 밟으면서 산다. 20대와 30대를 나에게서 뺏아간 남편이 밉지만 언젠가 이별을 해야 하는 우리 삶의 유한성을 알기에 그와의 삶에 오늘 만들어내는 편안한 추억(잔소리 없는 삶)을 만들어 본다.

삶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조급함을 잠시 내려놓고 그저 오늘 하루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는 식욕과 운동할 수 있는 건강함을 감사하며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들과 퇴근하는 남편을 위해 따뜻한 갈비탕을 준비한다.

내가 이렇게 지금, 오늘을 살아갈 때 가족들도 오늘을 살아 감을 느낀다. 가족들과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 갈 2018년이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기대가 된다.

<나 리/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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