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위안부 소녀상

2018-01-15 (월)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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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조선의 소녀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일본 군대의 성 노예로 만든 분노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중 많은 소녀들이 고통 끝에 살아 돌아오지도 못하고 살해당하였다. 이 애달픈 소녀의 모습을 조각가 김서경 씨와 그의 부인 김운성 씨가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이 유명한 <평화의 소녀상>이다.

어느 날 김 서경 씨는 광화문에서 인사동 쪽을 향하여 걷고 있었다. 일본 대사관 앞에 이르렀을 때 할머니들의 가두시위를 보게 되었다. 노인들의 데모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어서 그는 집회의 이유를 알아보았다. 할머니들은 일제 때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를 수요일마다 한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들의 증언을 듣고 있던 김서경 화백의 가슴에 울컥 하는 울분과 감동이 솟아올랐다.

김 화백은 곧바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찾아가 “나는 조각가인데 내가 도울 일은 없습니까?”하고 물었다. 그 때 할머니들이 위안부 소녀의 동상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김 화백은 일단 승낙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조각을 위한 스케치가 다 되기도 전에 얼마나 정보가 빨랐던지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 외무부에 압박을 가하는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김 아무개가 소녀상 제작을 획책하고 있으니 즉각 중단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도 김 화백의 작업을 중단시키지 않았고 소녀상은 완성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평화의 소녀상>이란 제목이 붙여진 이 동상을 작가인 김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다소곳이 두 손을 포갠 모습은 일제의 포악한 범죄에 대하여 약한 소녀지만 항거하는 결의를 담아 두 손을 꼭 쥐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꿈을 빼앗긴 소녀’를 형상화하려고 애썼습니다. 이 소녀는 일본의 전쟁범죄와 여성 인권유린을 온 세상에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작품을 작업하는 3개월 동안 작가인 김서경 씨는 내내 울고, 혼자 화를 내며 답답해지는 가슴을 끌어안고 일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언제 누가 보아도 이 소녀상은 깊은 감명을 주는 걸작이다. 작가는 소녀의 얼굴 표현에 특별히 많은 고심을 하였다. 희생자의 분노와 슬픔과 절망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슬퍼도 슬픔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화가 나도 화를 드러내지 않는 모습을 어떻게 형상화하느냐고 하는 것이 작가의 고민이었다. 어리고 여린 소녀지만 결연한 의지를 품은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온 힘을 다 기우린 작품이다. 소녀상이 완성되자 작가 부부는 소녀상 앞에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거칠게 잘린 머리카락은 가족과의 갑작스런 생이별을 나타내며, 어깨 위에 얹은 새 한 마리는 희생당하고 살아 돌아오지 못한 정신대 소녀들의 영혼을 상징한 것이고, 땅에 닿지 못한 발뒤꿈치는 조국에 살아 돌아왔어도 차가운 이웃의 시선과 아픔의 세월을 나타냈고, 소녀 곁에 놓인 빈 의자는 세상을 떠난 위안부들의 내세(來世)의 자리를 표현한 것이다. “정신대 할머니들이 20년 동안 거리에 나와 수요집회를 가지고 일제의 만행에 항거한 그 정성을 알리려고 만들었습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첫 ‘평화의 소녀상’은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 놓였다.(2011년) 이를 항의하는 뜻으로 일본 대사가 일시 귀국하는 소동을 벌였으나 곧 귀임하였다. 둘째 소녀상이 LA 글렌데일 공원에 설치되었으며(2013년) 다음으로 부산에 있는 일본총영사관 앞(2016년), 계속하여 조지아 주 부륵크헤븐 공원에 설치되었다.(2017년) 앞으로도 이 조용한 항거인 ‘평화의 소녀상’은 계속 전 세계를 향하여 외칠 모양이다.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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