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때 그리고 지금!

2017-12-30 (토) 김수자 /전 여고 동문회장
크게 작게

▶ 뉴저지 자문위원 글마당

1971년 미국에 도착 후 ‘까치 까치설날’ 노래를 흥얼거리곤 할 때가 있었다. 그러던 중 1979년, 모국 한국에 방문할 일이 있어 9살, 8살짜리 딸, 아들과 함께 우리 4식구가 흥분속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태어나자마자 미국에 온 것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은 할머니를 위시해서, 여러 친인척 그리고 4촌 지간과 정을 나누며 오랜만에 사람 사는 것 같은 분위기속에 흠뻑 흥겨움에 젖으며 기뻐했다.

때로는 주문해온 자장면에 고기가 적다고도 했고,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Excuse Me”를 안 한다고도 했다. 또 어느 날 시골에 가는 도중 가게에 들렀을 때 큰 소리로 짖어대는 강아지를 주인이 긴 빗자루를 거꾸로 들고 조용히 하라고 때리는 것을 보며 심
히 놀라는 적도 있었다. 차를 타고 군부대 앞을 지나면서 성조기를 보며 신나했고, 초소에 있는 군인의 경례를 받으며 무척이나 좋아했다.

2004년 일본 아소산 관광때, 차에서 내리니 군고구마 냄새가 코에 와닿았고, 일행은 일제히 군고구마 항아리 앞으로 달려가 마치 군고구마 사먹기 대회를 하는 것 같은 진풍경을 이루었다 화산 지역을 다 둘러본 후, 우리는 조그마한 돌 동상 앞에 서서 안내원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지름이 1미터쯤 동그란 형태였고 15도 가량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누워있고 그 동그라미 속은 여자 아이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었다. 곧 “깊어가는 가을밤에 낯 설은 타향에 외로운 밤 그지없어 나 홀로 서러워...”라는 노래 소리와 함께 안내원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비가 내리면 소녀의 눈에 빗물이 고이고, 고인 빗물은 마치 눈물처럼 흐른다는 것이었다.


그 옛날에 우리 한국인들이 일본에 머무르면서 눈물 흘리며 조국을 그리워하던 타향살이의 서글픔을 뼈아프게 실감했다 1970년대의 플러싱, 맨하탄의 거리는 노랑머리, 파란 눈의 한산한 물결이었다.

그 무렵 플러싱 거주 한인 가정은 아마 10가정도 안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하철 근처 거리 문방구점 앞에는 신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돈 통, 돈 접시가 놓여 있었다. 출근길에 지하철로 바삐 내려가며 올라오며 동전을 던지고 신문을 가져가곤 하였다. 하루는 가게에서 지불한 20달러 지폐를 점원이 10달러로 착각을 했었다. 매니저가 현금 출납함을 사무실로 가지고 가서 확인후 20달러가 맞는다고 하며 사과했다.

먼 옛날의 추억을 되새기며, 이제는 어디가 타향인지 모르게 급변하여, 모국 한국이 도리어 외국 같은 느낌이 들게끔 변하였다. 한국제품이 이곳 미국 온 가정에 가득하고, 세계 곳곳 구석구석에 한국분이 없는 곳이 없고 한국제품이 가득히 채워져 있다.

조지워싱턴 다리를 건너 테너플라이 집까지 오는 길 9W, 그리고 뉴저지의 RT4, RT17은 20년 전 까지만 해도 한산하기 그지없는 조용한 거리였다, 그러나 그 길 9W 선상에 언젠가 한국기업이 들어와 태극기가 게양됐고, 지금은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는 절벽위, 뉴욕과 뉴저지 사이의 최고 위치에 초현대식 5층짜리 한국기업의 사옥건물 건축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 옛날, 그 길, 그 곳, 그 때 그러나 지금은 이곳저곳 온 세계 속에서 완전히 다른 길, 다른 곳의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매일 눈뜨고 나면 새로운 발전 소식을 접하며 급변하는 성장과 소용돌이속에 우리 현대인 모두는 잘 적응하며, 보다 낳은 미래를 꿈꾸며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보람된 나날을 맞이하고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2018년 온 지구상의 온 족속에게 지금이라는 틀의 큰 변화 안에서 기쁨과 평안이 깃들기를 소망한다.

<김수자 /전 여고 동문회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