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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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아들

2017-08-09 (수) 여주영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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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지금 고개를 들 수 없는 심경으로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성원으로 대통령에게 당선된 이후 저는 자식들이나 주변의 일로 걱정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여러 차례 국민 여러분 앞에 약속 드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국 국민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저는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껴왔으며, 저를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마음의 상처를 드린데 대해 부끄럽고 죄송한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제 자식들은 법의 규정에 따라 엄정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대내외 한국인들은 지난 2002년에 발표된 이 문구를 대부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노벨상까지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국민사과문이다. 세 아들 모두가 비리에 연루되자 아버지 김대중 대통령이 국민들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발표한 내용이다.

그의 아들 김홍업이 20억원의 불법자금 수수로, 김홍걸은 제품 사업자 선정과 관련 36억원을 받은 혐의로, 또 장남 김홍일은 아버지 퇴임직후 불법 로비 스캔들에 연루돼 구속되면서 생긴 일이다. 그 때 모든 국민은 대통령의 아들들이 비리를 저질러 구속 수감되자 분노와 절망감에 휩싸였다.


더군다나 그 당시는 전 정권인 김영삼 대통령의 둘째아들 김현철이 이미 비리혐의에 연루돼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있던 터였다. 밤의 소통령으로 불리던 김현철은 아버지 퇴임후에도 또 다시 한 기업간부로부터 정치자금 20억원을 불법 수수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그는 집행유예 형을 받고 사면되었으나 한국정치사에 악명 높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되풀이되는 아들들의 비리로 궁지에 몰리자 김대중 대통령은 급기야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통렬한 사과와 자성이 담긴 담화문을 발표하고 나선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처럼 부끄럽게도 전 현직 대통령의 아들 대부분이 비리에 연루돼 검찰에 소환되거나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아들 이시형도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부지 매입에 연루된 혐의로 조사를 받은 일이 있다.

지금 미국에서도 최고 정계 이슈중의 하나가 바로 대통령의 아들 문제이다. 마이클 플린 전 국가안보보좌관으로부터 시작된 트럼프 대선캠프 관련 러시아 스캔들은 이제 트럼프의 가족으로 번지고 있다.

이는 몇주전 뉴욕타임스가 트럼프 최측근인 아들 도널드 주니어가 러시아정부의 측근인 나탈리아 베셀니츠카야 변호사와 접촉했다는 특종을 터뜨리면서 점화되었다. 사건은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지 2주 뒤인 지난해 여름 일이었다고 한다. 코너에 몰리자 주니어는 자신의 트위터에 러시아 인사와 나눈 이메일 내용까지 공개하며 대응에 나섰다.

베셀니트카야 변호사가 트럼프 주니어에게,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고, 이에 주니어는 “너무 좋다. 전화로 먼저 얘기하자”고 이메일로 답했다는 내용이다.

민주당 의원들은 “적국인 러시아와 공모한 반역행위라며 공격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주니어와 베셀니츠카야 러시아 변호사의 접촉은 러시아가 미 대선에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smoking gun)’라고 했다.

어쨌든 트럼프가 자신의 아들, 딸, 심지어 사위까지 총동원, 권력의 핵심부에 등용시키고 있는 것은 마치 지난날 대한민국 대통령과 아들들의 행적을 연상시켜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우리 같은 소수민족의 입장에서 가뜩이나 트럼프케어나 강화된 이민법안으로 술렁거리고 있는 이때, 대통령의 가족까지 개입된 스캔들로 미국내 정치가 더욱 혼란속에 빠져들지 않을까 우려되는 점에서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는 한국 속담이 정말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민주주의의 아버지격인 미국이나, 그 씨를 이어받은 한국이나 대통령이 자식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모양이다. 미국에서도 언젠가는 자식문제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국민 앞에 머리 숙여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고 나서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여주영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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