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허드슨 강Ⅰ

2017-08-04 (금) 고명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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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친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장대비다. 맨해튼 건물이 보인다. 강을 가로지른 현수교에 오를 때마다 허드슨 강은 내게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돛단배 한 척이 느릿느릿 강을 오르고 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던 마음앓이가 잔잔한 수면처럼 잦아들 때까지는 기나긴 세월이 필요했다.

타국에서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날씨와 같다. 지켜온 삶의 방식을 버리고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익숙하지 않은 문화와 환경을 받아들일 때의 설렘도 두려움에 가까웠다. 일터에서 서툰 언어로 하루의 절반을 보낸 후 한적한 마을에 자리 잡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서글프기만 했다. 사람들이 오갈 때마다 짖어대는 마을 강아지가 고향 생각으로 밤을 지새우게 했다. 교민을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들 두고 온 고향 향한 그리움이 덜 했을지도 모른다.

외국인은 피부색이나 생김새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어울림은 고사하고 삶이나 의사소통 방식이 달라 그들에게 다가가기조차 쉽지 않았다. 날마다 쌓이는 숙제가 가슴을 짓눌렀다. 살아내려는 생각들도 뒷전으로 밀려났다. 당장 그들 얼굴을 기억하고 이름부터 외워나가야 했다. 수첩은 모르는 단어로 빼곡히 채워졌다. 수첩에도 채울 수 없었던 것은 깨알 같은 소외감이었다.


이민 올 때 공항에 누가 마중을 나오느냐에 따라 직업이 정해진다는 말이 있다.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 부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인의 도움으로 조그만 가게를 얻어 사업을 시작했다. 찾아오는 손님이 맡긴 세탁물을 대형 세탁소에 보내 세탁한 후 손님에게 돌려주는 서비스업이었다. 3년 후에는 열 명 넘는 직원을 둔 세탁소를 직접 운영했다. 정원 넓은 집도 장만할 수 있었다.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외아들도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해나갔다. 저물녘이면 집에서 가까운 울창한 숲에 낯익은 새들이 고국의 소식을 전해주려는 듯 날아들었다. 다람쥐 가족은 이층집을 덮은 상수리나무의 열매가 익기도 전에 지붕을 제집 드나들듯 했다.

현지인보다 몇 배 더한 어려움이 따랐다. 어느 해 시월에는 십 년 가꾼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부동산 투자 회사는 우리 부부가 세든 동네에서 제일 큰 상가를 매입하면서 임대계약 기간에 있거나 계약 만료가 임박한 동양계 세입자들의 계약갱신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내쫓았다. 그들만의 방식을 헤쳐 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국인의 서러움이 가슴 깊숙이 자리 잡았다. 때로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나의 서러움과 투정을 받아줄 이는 고국의 강물과 합류할 허드슨 강의 잔물결뿐이었다.

허드슨 강은 우리 삼 남매 삶의 중심에 있다. 강을 건너야 동생들 가족과 함께할 수 있어서만도 아니다. 허드슨 강 상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선체를 맡기는 돛단배보다 물줄기를 거스르는 동력선이 남긴 물결의 파장이 크다. 동기간의 만남은 고국에서보다 진지하다. 살아갈 날들을 설계해야 했던 초기와는 달리 살아온 날들에 얽힌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는다.

현지인들보다 눈에 띄게 앞서가다가는 내가 겪었던 일을 그들이 겪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날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내 삶이 과거에 얽매인 것은 아니란 것을 유유히 흐르는 강은 내게 일깨워 준다. (월간문학 통권 560호 신인작품상 수필부문 당선작 전반부)

<고명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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