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푸른 눈동자

2017-07-29 (토) 윤혜영 /병원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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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이에게 문제가 있어서 오시라고 그랬어요” 오래전 일이다. 디이는 초등학교 4학년인 내 딸이고 내 앞에 앉아있는 보이런씨는 디이의 담임선생이다. 디이의 문제는 나도 감지하고 있던 터였다. 얼마 전 그 애의 방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구겨진 시험지에 부모의 사인을 요구하는 선생의 노트가 있었는데 그냥 백지였다. 이걸 쓰레기통에 쳐박아 버린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선생의 편지가 없어도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학교에서 출두 통고서를 받고 보니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나는 머리를 조아리고 디이는 화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책상위의 종이는 얼핏 만화 같기도 하였다. “교육자 생활 30년만에 디이같은 아이는 처음이에요.” 보이런씨가 그 그림을 펼쳐 놓았다. 마귀할멈을 요정이 혼내주고 있는 그림인데 징징 우는 마귀할멈 밑에는 “미세스 보이런”, 혼내주는 요정 밑에는 “나. 디이” 라고 씌어진 그림이었다. “이걸 디이가 그렸어요? 보이런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본 것은 50대 중반쯤 백인 특유의 잔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유리알처럼 빛나는 보이런씨의 푸른 눈동자. 그 눈동자가 냉기를 뿜었다. “죄송합니다.” 그 냉기를 피해 디이를 노려보았다. “디이, 내 얼굴 좀 봐” “난 보이런씨 얼굴을 보기 싫은 데요” 나는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소리를 질러댔다. “엄마, 난 잘못한 것 없어요. 나는 인종차별을 당했어요. 그렇지요? 미세스 보이런, 난 당신얼굴을 보기 싫어요.”


선생 앞에서 적당히 사과하고 아이를 적당히 야단치고 가슴속에 검은 구름을 씻어버릴 요량이었는데 계획이 빗나가 버렸다. 나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에게서 냉기대신 부서져내려 깨져버릴 것 같은 푸른 조각들을 보았다. 그 얼굴은 일순 하얗다가 곧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당혹함이 온 얼굴에 퍼져나가면서 팽팽하던 표정이 젖은 마분지조각처럼 구겨져 내렸다. 선생의 태도가 딴 아이들과 다른 것을 감지한 어린 내 딸 디이의 아픔과 분노를 보았다.

“디이, 아니야. 난 너희들 모두를 똑같이 사랑해.” 보이런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소리에서 잘못을 들킨 사람의 당황함을 보았다. “아니요 당신은 거짓말 하고 있어요. 다 알고 있어요. 엄마 집에 가요.” 아이는 벌떡 일어났다. 그래도 한국에서 교육받은 정서를 가진 나로서 선생에게 그런 태도를 갖는 것은 옳지 않다.

“”디이, 잘못했다고 해. 다시는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아이는 대꾸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미세스 보이런, 아이 대신 사과합니다.” 갑자기 보이런씨가 나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디이 나이 아이들은 때로 아주 예민해요, 제가 디이를 차별했다니 말이 안되요.” 본인이 인종 차별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보이런씨에게서 가식과 비굴함이 묻어났다.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네, 어머니께서 잘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내 손을 흔들며 다짐받는 보이런씨의 냉기 사라진 푸른 눈동자는 징그러웠다. 나는 뭘 이해하였는지도 모른 채 “그럼요, 그럼요.” 손을 잡고 흔들며 굽신거렸다. 돌아오는 차속, 디이가 “엄마, 왜 엄마가 잘못했다고 그래요? 난 엄마 때문에 더 화났어.” 아! 나는 정말 비겁하고 당당치 못했다. 분연히 일어나 책상을 치고 “당신은 교육자 자격이 없어” 소리치고 나왔어야 했다.

이제 어른이 된 디이에게 물었다. “그때 보이런씨가 널 어떻게 대했니? “아이를 차별대우하는 선생은 자격이 없어요.” 세월은 많이 변했다. 이제 푸른 눈동자에 우리 아이들에게 냉기어린 시선을 주는 교사는 없을 것이다. 그런 교사를 마귀할멈으로 묘사하고 반항한, 이제는 어른이 된 전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토양이 있음으로…

<윤혜영 /병원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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