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길에서 만난 사람

2017-07-28 (금) 최동선 전 커네티컷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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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처마 끝에 매달아 둔 작은 풍경이 지나가는 바람을 붙잡고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어느 시인은 온 세상을 새로이 바꾸어 놓는 7월을 신비의 달이라고 노래했었다.

그렇게 7월은 나의 가난한 앞뜰에서, 가로수를 따라 산에 닿아서도 그대로 신비가 되었다. 지금이라도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숲길을 따라 들어가면 내가 그 7월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더우면 그늘에 쉬고, 무료하면 다시 걸으며 , 밤이 오면 지친 몸을 누인 잠자리에서 내가 지나온 길지 않은 세상을 기억되는 대로 기억하고 ,더러는 참회하고, 또 가끔은 회환에 젖어 스스로를 자책하다 잠이 들 터이다.

서재 한구석에는 오래된 흑백사진이 놓여 있다. 협곡 아래로 펼쳐진 장엄한 대자연 앞에서 감탄사를 터뜨리다 가이드에 이끌려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며 급하게 담아 두었던 사진이다. 당시만 해도 드물던 해외 연수단 틈에 끼어 미국 여행을 하던 청년이 사진 속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먼 훗날 이 낯선 땅에 정착해 살게 될지도, 다시 그곳을 가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게 될지도 그때는 몰랐었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뭉클함이 바로 그리움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오랫동안 벼르던 여행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 휴가 때 마다 늘 순위에 밀려 마지막 목적지가 되지 못했던 그 곳은 40여년 전의 사진 속 풍경 그대로였다. 협곡 아래로 끓어질듯 이어진 흙먼지 나는 꼬불꼬불한 길을 눈으로만 더듬던 청년도 거기 있었다. 내가 간직하던 흑백사진 속 풍경 앞에 마주 서니 그동안 모호했던 그리움이 꼬물꼬물 되살아나며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랜드 캐년 (Grand canyon)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유혹하는 헬기 관광을 뒤로 하고 수십 년 쌓아 두었던 그리움을 천천히 만나기로 했다. 쉬워 보이는 트레일 코스의 지도를 받아들고 협곡 아래로 실처럼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내가 앞섰고 아내가 나를 따랐다. 놀라움에 내가 쉬면 아내가 앞섰고 내가 그녀를 따랐다.

때로는 탄성을 뱉어내고 더 많이 말을 잃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대화였고 유일한 표현이었다. 어쩌면 침묵은 그 웅장한 대자연 앞에서 나그네가 드리는 최고의 경배이자 최소한의 예의 같았다. 협곡 건너편에 드리워진 산그늘이 침묵으로 화답하고 협곡의 깊숙한 곳을 실타래처럼 휘감고 흐르는 콜로라도 강에 내려앉은 햇살이 태고적 모습으로 빛났다.

성큼 성큼 내려갈 때와는 다르게 올라오는 길은 무척 힘들었다. 삶은 역시 산을 오르는 일처럼 늘 가파르고 힘겨운 일임을 느낀다. 발끝만 보고 한발 한발 내딛으며 걷기도 하고, 그래도 숨이 턱에 차오르면 그늘에 앉아 쉬어 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려갈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풀꽃이 보이고, 바위의 갈라진 틈새에 간신히 뿌리 내린 키 작은 나무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위대한 자연 앞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이 얼마나 사소한지, 심지어 실패까지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함을 배운다.

한사람 지나가기도 빠듯한 길을 비켜서기도 하고, 끝났다고 생각되는 길 끝에서 다른 길이 이어지는 것을 보며 길은 길로써 만나고 그 길을 따라 사람과 사람이 만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달았다.

이제 다시 흑백 사진 옆이다. 흑백 사진의 기억을 따라 무작정 떠난 휴가였다. 그 길 끝에서 만난 사람., 그 아름다운 여정에 함께한 동행자가 있었음에 감사한다. 사진 속 풍경이 7월의 숲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날, 한해의 반환점을 돌아 작은 쉼표를 찍는다.

<최동선 전 커네티컷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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