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먼저 하면 선구자

2017-07-14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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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초복이 지났다. 초복(初伏)은 12일, 중복(中伏)은 오는 22일, 말복(末伏)은 8월 11일로 이 삼복(三伏)기간이 여름철 중 가장 덥다. 예부터 더위에 지쳐 식욕이 떨어지기 쉬운 몸을 보하고자 복날에는 뜨거운 보양식을 먹었다. 또 복날에 남자들은 계곡에서 탁족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아녀자들과 아이들은 물가에서 먹고 놀며 더위를 잊었다.

그러나 빌딩 숲에 갇혀 사는 도시인들에게 쉽고 만만하게 갈 곳이 어디 일까? 뉴욕에서 복더위를 이기자면 뮤지엄이나 영화관, 도서관을 찾아보라. 과부화나 전기료 걱정없이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와 피서지로 그만이다.

아니면 이열치열(以熱治熱)로 더위를 극복한 조상의 지혜를 체험하면 어떨까. 하나의 방법으로 맨하탄 하이라인을 걸어보자. 따끈따끈한 햇빛이 머리를 강하게 내리쪼이면 시야가 몽롱해지면서 ‘멍 때리기’의 정수를 맛볼 것이다.


이 복더위에, 얼마 전 이열치열 피서법을 택해 하이라인을 걸었다. 공중에 뜬 하이라인은 도로보다도 높으니 햇볕도 정수리로 바로 내리꽂혔다. 뭐, 걸을 만 했다. 그리고 하이라인 종착지인 휘트니 뮤지엄으로 가서 현대미술을 만났다.

휘트니 뮤지엄은 다운타운으로 이전한 이래 올해 첫 휘트니 비엔날레를 열었다. 세계 3대 비엔날레 중 하나로 78년 역사를 지닌 휘트니 비엔날레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트렌드를 리드한다는 평을 들어왔었다.

그런데 전시작들이 점점 난해하고 괴기스럽게 변하고 있다. 눈 코 입이 낱낱이 해체된 인체, 블랙 가비지 백을 태우고 꼬고 뒤틀어 만든 작품은 예술인지, 쓰레기인지 잘 모르겠다.

한국의 국립민속박물관은 오는 19일부터 10월31일까지 프랑스, 유럽 지중해 문명박물관과 함께 특별전 ‘쓰레기 X 사용설명서’를 연다고 한다. 쓰레기를 재활용한 물품과 쓰레기로 취급해 버려질 뻔한 유물을 함께 선보인다. 전시는 쓰레기를 만든다, 쓰레기를 처리하다, 쓰레기를 활용하다 등 3부로 나뉜다고 하는데, 세상에나, ‘쓰레기’가 작품전 제목이다.

‘ 이게 뭐야? ’ 하는 얼굴로 전시작을 보고 있는 내게 함께 구경하던 조카가 미대 출신 동생이 한 말을 전해준다. “ 미대생들이 방학이 끝날 때까지 숙제를 못했을 때 순식간에 해치우는 것이 바로 추상화래. 잭슨 폴락이 물감을 쏟아 추상표현주의 선구자가 되었듯 쓰레기를 가장 먼저 활용한 작가도 선구자인거지.”

알콜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잭슨 폴락이 그림을 그리면서 내내 투덜투덜 되던 말이 “제기랄, 피카소가 다 해버렸어. ” 였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스튜디오 바닥에 대형캔버스를 깔고 드립 페인팅(drip painting)으로 물감을 붓거나 흘리는 일을 가장 먼저 했다. 그래서 1945년 추상표현주의 선구자가 되어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후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 미국작가를 띄울 필요도 있었고...

작년 여름휴가에 롱아일랜드 이스트 햄튼의 잭슨 폴락(1912~1956)과 리 크레스너(1908~1984) 하우스를 간 적이 있다. 부부가 살던 집 바로 옆에 외양간을 작업실로 만든 스튜디오가 있다. 방문객들은 덧버선을 신고 잭슨 폴락이 스튜디오 바닥에 작품을 하다가 흘린 페인트 자국이 말라붙은 마루 위(뮤지엄측이 정비한)를 걸어 다녔다.

피카소 탓을 하던 그는 훗날 화가 유망주들이 ‘이런, 잭슨 폴락이 다 해버렸어.’ 하는 말을 하리라 짐작도 못했겠지. 뭐든 먼저 하면 선구자고 임자다, 돈과 명성도 따라온다. 폴락도 유명해지면서 겨울에도 못 놓았던 집 보일러와 배관시설을 했다.

그러고 보니 수년전부터 한국의 냉장고 바지가 미국 CNN방송에 소개되고 연예인들이 냉장고 바지를 입고 예능프로에서 요리를 하는 등 인기를 끌었다. 폴리에스테르, 린넨, 인견 등이 소재인 이 옷을 입으면 냉장고처럼 시원하다고 한다. 올해에도 여전히 인기인데 처음 만든 누군가도 유행을 이끈 선구자다. 이 냉장고 바지는 입은 폼이 우습지만 폭염과 열대야를 이긴다면야 얼마든지 입을 생각이 있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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