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주에 걸쳐 설교하신 내가 속한 교회 담임목사님의 설교가 들을수록 깊이 새겨볼만하다. 첫째 주는 “번제할 어린 양은?”(창세기 22:1~18) 이었고, 둘째 주는 “불뱀에서 놋뱀으로”(민수기 21:4~7) 이었다. 셋째 주는 “성문에서”(룻기 4:1~6) 라는 제목이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공통된 제목이다.
'번제할 어린 양은?' 에서는 이삭이 그리스도의 예표요, '불뱀에서 놋뱀으로'는 놋뱀이 그리스도의 예표요, '성문에서'는 보아스가 예수님의 예표이다. 이삭은 비극적 현실을 파악한 후에도 묵묵히 그 번제단 위로 올라간 데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부자의 순종의 모습을 내려다 보시고 계셨다. 이 것은 그리스도의 상징인 수양을 예비하신 것이다.(모리아산: 이 곳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하나님이 내려다 보신다는 뜻)
민수기는 ‘불평의 책’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지속적인 불평을 늘어 놓았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그들은 400년 노예생활로부터 해방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험로속에서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며 지금까지 생존케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불평거리로 삼았다. 즉 구원과 은혜의 본질을 불평의 재료로 삼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교정하시기 위해 번쩍 드는 징계를 하신다. 그것이 바로 불뱀으로 백성들의 일부를 죽이신 사건이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께서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놓으시고 그 “놋뱀을 보면 살리라!"고 약속하신다. 그리스도도 죄인의 모습을 하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우리를 적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시는 은혜의 부활의 모습인 것이다. ‘죄악의 불뱀’ 에 물린 우리들은 오직 ‘놋뱀이신 그리스도’ 를 바라봐야만 살 수 있다. 그래서 놋뱀은 그리스도의 상징인 것이다.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가 이삭줍은 현장에서 만났던 룻은 바로 이런 여인이었다. 룻은 과부(한국식으로는 미망인) 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사회적인 약자였던데다가 모압 출신의 이방여인 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면에서 온 인류의 구속자요 공급자이신 ‘기업 무를 자’가 되셨다.
우리 각자가 죄악의 노예상태로 사탄 마귀에게 팔려있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의 목숨 값으로 대신 지불하시고 우리를 ‘다시 사오신 분’ 인 구속자가 되셨다.
보아스가 한 가문을 위해 그렇게 했다면 주님은 모든 가문, 모든 사람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룻기에 등장하는 ‘기업 무를 자’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다. 그리스도의 예표이신 이삭, 그리스도의 상징인 놋뱀, ‘기업 무를 자’ 보아스를 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가슴 속 깊이 새겨두었다.
보아스가 룻 대신 값을 지불하고 룻의 모들 것을 회복시켜 주었듯,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죄 값을 하나님께 지불함으로 우리를 다시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 지금 이 시간까지 하나님의 다스림과 돌보심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드리며, 3주동안 감동을 선사한 '예수그리스도의 예표'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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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교육가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