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리석음과 지혜

2017-07-01 (토) 소예리/ 교무·릿지필드 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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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법회에서 소태산 대종사의 ' 자기가 어리석은 줄을 알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지혜를 얻을 것이요, 자기가 지혜 있는 줄만 알고 없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지혜 있는 사람이라도 점점 어리석은 데로 떨어지나니라.' 라는 법문으로 교도들간에 의견을 교환하며 경험을 나누고 서로의 지혜를 단련하는 시간이 있었다.

위의 법문이 주지하는 중요 말머리를 고르자면 하나는 ‘어리석음’이고 하나는 ‘지혜’일 것이다. 그런데 그 두 말머리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연결되어 상승의 효과를 내느냐 하락하느냐의 기로를 결정하게 됨을 알 수 있다.

법문 내용에는 빠져 있지만 알고 인정하고 지혜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다.


부처님 말씀에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무지(無知)’라는 말씀이 있다. 아는 것이 없고, 하는 것이 미련하고 우악스러우면 죄를 짓기가 쉽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무지와 무명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며 사는 것이리라.

‘슬기롭지 못하고 둔하다.’ 가 ‘어리석다’에 대한 사전적 정의이다. 거기에 ‘슬기’란 뜻을 한컴사전에는 ’사리를 밝혀 일을 잘 처리해 가는 능력‘이라고 했다. 결국 어리석다는 것은 일과 이치인 사리(事理)를 밝혀 일을 처리해 가는 능력이 부족하고 둔하다는 뜻일 것이다.

위의 소태산 대종사 법문은 인간이 스스로 어리석다는 자각이 있으면 큰 지혜로 나갈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는 말씀이다. 또 큰 지혜를 가졌다 하더라도 순간순간 자신의 교만을 점검하면서 지혜단련을 계속하면 그 지혜를 유지하고 키워갈 수 있으나 자만과 교만에 빠져 아상에 걸려 엷고 작은 지혜에 얽매여 산다면 큰 지혜를 얻지 못하고 결국 사리를 밝혀 일을 처리해가는 능력이 떨어질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오쇼 라즈니쉬는 그의 저서에서 “지혜는 어리석음을 먹고 자란다.”고 하였다. 공자는 ‘큰 지혜는 어리석은 듯하다.’고도 하였다. 심지어 노자는 ‘큰 지혜는 어리석음과 같다.(大智若愚)’고 하였다. 큰 지혜와 어리석음이 같다니 이 무슨 엉뚱한 말인가.

‘부처님은 부지런 딴딴’이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이미 부처의 경지를 이루었는데 뭐 더 할 일이 있어 부처가 되어서도 부지런을 떨어야 하느냐고. 그러나 그것은 공부의 과정을 잘 모르는 생각이다.

우리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태어나서 끊임없이 하는 아니 해야 하는 행동들이 있다. 숨쉬고, 먹고 자고 배출하고 일하고 공부하며 산다. 부처가 부처의 경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지행합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꼭 부처가 아니라 하더라도 기술자도 학자도 운동을 하는 사람도 심지어 멋진 복근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만한 노력이 따라야 유지 발전이 가능한 법이다.

단지 부처와 중생의 다른 점이라면 부처는 티 나지 않게 흔연히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고 중생은 그것을 티가 팍팍 나게 힘들여 수행하는 차이라고나 할까. 참으로 큰 진리는 보이지 않고, 참으로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큰 지혜와 어리석음은 같다고 한 것이겠지.

비록 중생은 지혜가 부족하여 큰 진리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지만 그럴수록 눈을 밝게 뜨고 회광반조하여 자기를 낮추고 자기의 그름을 잘 살펴야겠다. 그 또 귀를 활짝 열고 주변의 알뜰한 충고를 잘 듣는 사람이면 반드시 어리석음을 벗어나 지혜로운 인생을 구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니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눈, 코, 귀, 입, 몸, 마음을 다하여 잘못을 알고 잘못을 참회하고 이 이상의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 어리석은 듯 노력하는 사람이 제일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

<소예리/ 교무·릿지필드 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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