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목소리에도 표정이 있다

2017-06-19 (월) 정영휘/ 예비역 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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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정목일 선생께서 어느 장님부부 댁을 방문했을 때 이런 질문을 했다. “살면서 남들에게 속아본적은 없으십니까? 눈이 안 보인다고 속이려 드는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요” 뜻밖에도 장님 부부는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멀쩡한 사람도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세상, 노상 속으며 사는 게 인생살이인데, 앞 못 보는 장님이 한 번도 속은 적이 없었다니? 아무래도 수긍이 가질 않아 재차 물으니 그 장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목소리를 들어보면 속일 사람인지 진실한 사람인지 알 수 있지요. 남들은 장님이니까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린 속지 않습니다. 소리에도 표정이 있거든요. 속이려는 사람과 사기꾼의 음성은 자연스럽지 못하고 진실 되지 않은 데가 있어요. 마음의 균형이 깨트려져 흔들림이 있고 초조하고 어두운 면모를 보입니다. 지나치게 과장하고 아부하려 들며, 요란 번지르르 하고 순수한 마음이 없지요.”

우리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고 그의 마음을 읽는다. 인간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나타내는 유일한 동물이며 그 감정은 얼굴을 통해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편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의 감정 표현은 얼굴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전화 통화에서 목소리에서 일그러진 얼굴을 짐작 할 수 있고,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에서 품위 있는 미소를 읽을 수 있다. 목소리는 속일 수 없는 마음의 울림이기에.


마음이 밝아야 얼굴의 표정이 밝게 비춰지는 것처럼, 맑고 순한 마음이 있어야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다. 어질고 부드러운 사람의 목소리에선 포근한 정감을 느끼게 된다. 얼굴이건 목소리건 바탕은 마음이다. 인사 한마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 된 목소리라야 상대에게 반가움과 기쁨을 줄 수 있다. 너 나 없이 바쁜 세상에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입에 바른 인사치레 말에 누가 그리 반가움을 느끼겠는가.

현대과학은 소리의 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돼지나 닭 농장에서 음악을 들려주면 성장과 산란에 효과가 있다고 하는 실험의 예를 우리는 알고있다. 콩나물과 나팔꽃을 기르면서 고운 말을 들려 준 쪽이 나쁜 말을 들려 준 쪽보다 병 없이 잘 자란다는 실험 결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오감과 감성을 가진 인간에게 있어서랴.

처음 만나는 사람의 인물됨을 평가 할때 우리는 우선 얼굴과 몸의 생김새를 본다. 다음은 말이다. 맑은 소리로 하는 것이기에 목소리의 톤이나 음색이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 다음은 지적 수준과 교양, 성격 등 인격의 됨됨이다.

첫 인상이 좋아서 한 눈에 반했던 사람이 시간이 흐리고 접촉하는 빈도가 잦아질수록 싫증이 나는 경우를 많은 사람이 경험한다. 이유는 몸 짱, 얼굴 짱 외에 다른 요소들이 턱 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평가 받는 요소 중에 목소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 보다 크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겨둘 일이다.

지금 나는 가수의 맑은 목소리나 아나운서의 정확한 발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맹인 부부가 속지 않은, 진실이 담긴 사람의 목소리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정영휘/ 예비역 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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