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자와 남자

2017-06-26 (월) 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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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에서도 여자들의 경기가 인기 있다. 비키니 차림의 해변 배구는 두말 할 것도 없고 농구, 탁구, 소프트 볼, 수영, 6인조 배구 등 남성 경기의 인기를 능가하고 있다. 올림픽 육상의 여자부가 생긴 것은 겨우 1928년 암스테르담 대회 때부터인데 지금은 단거리 장거리 경주까지 여성 경기가 눈길을 모으고 있다. 미국에서 여자 권투, 여자 축구가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내가 아는 배구 코치가 있는데 여자 선수들은 6~7시간을 뛸 수 있으나 남자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지구력 면에서는 여자가 낫다는 이야기이다. 독일에서 어떤 여자가 100Km를 계속 달려서 화젯거리가 된 일이 있는데 속력을 따지지 않고 오래 달리기로는 역시 여자가 나은 모양이다.

생리적으로나 성격적으로 여자와 남자는 참 재미있는 대조를 가지고 창조되었다. 한 마디로 남자는 처음에 승부를 걸고 여자는 나중에 승부를 낸다. 남자는 힘차게 출발하고 여자는 차분히 마무리 한다. 어느 쪽이 낫다고 따질 성격이 아니라 양 쪽 모두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둘을 합해야 이상적인 인간이 된다. 남녀가 합하여 한 몸이 되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연애 시절 혹은 결혼 생활에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상대방의 특징을 충분히 인정하는 것이다. 퍼즐 게임의 조각들을 찾아 이리저리 연구하며 천천히 맞추어나가듯 남녀 사이도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 서로 잘 맞추어 나가야 한다. 본래 완전하게 맞는 남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큼 맞추느냐 하는 데에 재미도 있고 기대도 이고 그것이 사랑의 행로인 것이다.

TIME 지는 최근 미국 가정에서의 남녀의 역할 변화를 보도하였다. 남자가 아이 양육을 맡고 여자가 나가 직장 생활을 하여 경제를 꾸려나가는 가정이 이미 21%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안사람’, ‘바깥양반’의 개념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남녀의 원칙을 따질 문제가 아니고 경우와 실정에 따른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누가 부엌에 가고 누가 기저귀를 갈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에서 힘의 균형을 논하지만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경제권 이니 발언권이니 하는 권위의 우선을 말하게 되면 이미 사랑에서는 이탈되기 때문에 행복과 연결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고 보충적인 존재이다. 어느 한 쪽만으로는 완전치 않다. 사랑 결혼 가정 등은 남자와 여자의 조화가 만들어가는 예술이다. 하모니(Harmony-화음)를 사전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소리들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다. 그래서 더 자연스럽고 발전된 새 질서를 창조하는 음악 형성의 3대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런 내용은 음악뿐만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서도 같다. 남녀의 합침은 더 발달된 새 소리를 만들기 위한 신의 작업인 것이다. 그러기에 깊은 ‘이해’가 따르지 않는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한다. 나와 ‘다른 점’을 음미 할 줄 알아야 화음을 이룰 수 있다. 차이점은 불평의 건더기가 아니라 발전의 건더기이다. 올림픽에서 배구의 미국 대표 팀이 경기를 시작할 때 “TOGETHER!”하고 외치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함께 이룩하자! 는 뜻일 것이다. 남자와 여자도 부부 문제로부터 세계 문제까지 TOGETHER를 잊지 않아야 한다.

사랑이란 어떤 종착역이 아니라, 두 사람이 오랜 세월을 동행하며 고통과 즐거움을 나누는 과정이다. 사랑이란 조용한 이해이며 깊은 신뢰이고, 넓은 용서이다.

<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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