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소로의 오두막

2017-06-23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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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보스턴의 조카를 보러 간 길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1817~62) 의 오두막을 찾아갔다. 오래 전 소로의 저서 ‘ 월든(WALDEN) ’을 읽었을 때, ‘무소유’의 법정 스님이 늘 머리맡에 두고 살았다는 글을 본 이후, 꼭 한번 가고 싶던 차였다.

보스턴 시내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콩코드 월든 호수는 책에서 읽던 것과는 많이 다르게 인공적으로 정비되었고 소로가 살던 집을 재현한 오두막이 월든 호수 주차장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집터를 찾아가는 길은 호숫가를 따라 나뭇잎이 삭아 가루가 된 오솔길을 15분 정도 걸어 들어갔고 호수에서 2, 30야드 떨어진 언덕 위에 길이 15피트, 넓이 10피트로 네 평 남짓한 공간이 말뚝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집터 안에 벽난로 밑돌이 높여있고 집터 왼쪽으로 돌무덤이 있었다.


나무가 우거진 호수일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수영을 하고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매사추세추 주정부가 주립보존공원으로 지정하고 소로학회를 비롯한 민간단체들이 공원의 훼손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소로는 침대, 책상, 의자 셋, 스튜용 냄비, 프라이팬 나이프와 포크, 컵, 스푼으로 소지품이 단촐 했는데 의자 셋은 왜 필요했을까? 하나는 고독을 위한 의자 둘은 우정을 위한 의자 셋은 친교를 위한 의자였다는데 손님이 찾아오면 세 번째 의자를 내줬지만 대부분은 서서 대화를 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노임을 빼고 판자와 창문, 벽돌, 못, 경첩과 나사 등에 28달러12센트 남짓으로 집을 지었다. 당시 하버드 대학에서 그 방보다 조금 더 큰 방 하나에 방세로 매년 30달러를 내었다. 집 근처에 호두, 감자와 옥수수, 완두콩과 순무를 심어 2년간 농사를 지었고 팔기도 했으며 이스트를 넣지 않은 호밀가루 빵, 감자, 쌀, 소량의 돼지고기와 소금을 먹고 살았다.

소로는 하버드대 졸업생으로 하버드대 교수인 랄프 왈도 에머슨 소유의 땅에 집을 지었다. 그 두 사람은 대중보다는 개인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인간보다는 자연을 예찬했다. 소박한 삶을 권면하는 지침서 ‘월든’을 읽은 순례자들이 매년 60만명 이상 이곳을 찾아온다고 한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갖춰 놓고 깊이 있는 삶을 살고자 한 소로의 오두막에 가보니 그만 하면 혼자 살기에 충분했다. 양쪽으로 유리창이 있어 숲이 보이고 벽난로가 있어 음식도 해먹을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소로가 산 2년2개월2일이 아니라 그 이상도 살 것 같았다.

소로는 1845년 7월4일, 독립기념일에 월든 오두막으로 입주했다. 미국의 프론티어 정신에 갇혀 껍데기만 남은 미국 사회를 반성하여 월든 호숫가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오두막은 상징성이 깊다.

이 지역 콩코드는 1635년 매사추세츠 만에 정차한 영국의 이주민들이 내륙 쪽에 건설한 첫 정착마을이다. 그리고 1775년 4월19일 콩코드 강을 가로지르는 노스브리지에서 식민지의 민병대와 영국 주둔군이 충돌하면서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콩코드는 에머슨이 ‘콩코드 송가’에 쓴 그대로 전세계에 울려퍼진 첫 총성의 무대로 미국의 건국과 함께 역사적 명소이기도 하다.

200년 전에 태어나 살다간 소로의 집에 갔다 온 이후 짐정리를 하고 있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매일 버리고 있다. 단순하게 살라고 하는데, 백 가지 천 가지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이라고 하는데 이 나이에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소로도 그랬다. ‘진정한 독서를 하기에 적당한 곳이나 여름내 책상위에 호머의 ‘일리아스’를 놓아두었지만 가끔 읽곤 했다. 집도 마저 지어야 했고 콩밭에서 잡초를 뽑아야 했고 그러면서도 앞으로 책을 읽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고 말이다.

그에게서 매일 자연 그 자체만큼 소박하게, 순수하게 살라는 유쾌한 권유를 들었고 고마움에 집터 옆 돌무덤에 돌 하나를 얹어놓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존경을 표하는 마음에서 그랬다지만 나는 새로운 소원 하나도 같이 얹었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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