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투우광이었다. 평생 18번이나 스페인의 투우 축제에 참여했다. 축제에서 헤밍웨이는 인간과 소가 서로 겨루는 ‘생과 사‘의 치열한 대결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 후에 쓴 책이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이다. 헤밍웨이는 이 책에서 투우의 운명적 죽음을 빗대어 양육강식의 비정한 전후(戰後) 사회를 고발하려고 했다.
투우 경기는 공정한 룰에 의해 진행되지 않는다. 경기에 등장한 소는 애초부터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24시간 동안 어두운 독방에 갇혀 있다 풀려 나온 소가 이러 저리 불안하게 날뛰도록 각본이 짜여져 있다. 이때 긴 막대에 감은 빨간 휘장 안에 예리한 검을 감춘 투우사 세 사람이 교대로 등장한다. 그들은 연마된 기술을 가지고 어김없이 소의 급소에 검을 꽂아 넣는다.
투우사들과 밀고 당기는 생사 게임을 하다가 소가 지쳐 좌절했을 때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전략이 있다. 꿰렌시아(Querencia)로 피하는 것이다. 투우장 들어 온 소는 꿰렌시아가 어디에 있는지 직관으로 안다. 지진이나 쓰나미가 밀려오기 전에 그 진동을 미리 감지하고 산으로 피하는 동물의 귀소본능과 같다.
아무리 투우사에게 치열하게 쫓기던 소라도 일단 꿰렌시아의 영역 안에 들어가면 지고(至高)의 평안과 안전을 느낀다. 그곳에서 헐떡이던 숨을 고르고, 불안감과 위기의식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회복한다. 소에게 꿰렌시아는 어머니 자궁 같다. 그곳에서 소는 더 이상 불안하지 않다. 그곳에서 소는 신비한 생명의 접촉을 체험하고 돌연 거듭난다. 도약하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이 있다. 어떤 유능한 투우사라 할지라도 꿰렌시아 영역 안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소를 공격하면 위험하다. 소의 무자비한 선제공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꿰렌시아는 단순히 숨을 고르는 휴식 장소가 아니다. 위기 때마다 올랐던 시내 산이 모세에게 거룩한 성산(聖山)이었듯이 소에게도 그 곳은 일종의 성소(聖所)다. 투우사가 꿰렌시아 안으로 무례하게 진입하면 소는 모욕감을 느끼고 대 반격한다.
투우 경기의 결과는 소가 필요할 때 마다 꿰렌시아에 가서 충분히 쉬고 회복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경험 많은 노련한 투우사는 소만이 알고 있는 비밀의 장소 꿰렌시아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애쓴다. 한편 소는 투우장 안에 들어오자 말자 주변을 맴돌면서 자신의 꿰렌시아를 찾으려고 심혈을 기울인다.
일반적으로 소가 꿰렌시아로 삼는 것은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는 입구 문 근처나 그 문에서 가까운 벽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곳이 소가 가장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고 둘째, 등에 기댈 것이 있어서 배후의 안전과 평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어로 꿰렌시아(Querencia)는 ‘회복의 자리, 치유의 자리’라는 의미를 지녔다. 정기적으로 갖는 교회의 수양회나 피정의 프로그램은 꿰렌시아의 전형이다.
수양회나 피정을 통하여 교인들은 기계같이 고정 된 도시 생활에서 잠시 벗어난다. 낯선 자연의 타자와 어울리면서 순수한 자유와 느슨함의 행복을 누린다. 그때 세상에 오염된 영혼이 정화되고, 상처받은 영혼은 치유 받는다. 재창조의 역사가 꿰렌시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5월 중순 신학교가 종강했다. 쉬고 싶었다. 나이가 들었어도 어머니 계신 서울에 가면 자유롭게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JFK를 떠난 한국행 비행기의 서비스는 탁월해서 심신은 즐겁고 편안했다. 읽고 싶던 책도 몇 권 손에 쥐고 있으니 더 부러울 것 없었다. 푸른 하늘에 높이 떠있는 비행기도 얼마든지 꿰렌시아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의 꿰렌시아는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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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