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지만 요즘은 뇌물죄로 연루되어 대통령도 감옥에 가는 세상이라 그 단어가 갖는 위세와 죄악의 첨례함은 천하가 떨만하다.
뇌물은 주어도 안 되고 받아서도 안 되는 행동일 것이다. 나야 평생 뇌물을 받을 일도 줄 일도 없는 세상을 살지만 오래전 담배 한 갑 또는 자장면 한 그릇의 뇌물(?)을 주고 순조롭게 일처리가 진행된 적이 있기는 하다. 그것을 뇌물로 생각해 본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 뇌물과 연관된 일련의 에피소드로 나는 범죄에 연루되었던 적이 있다.
오래전, 선생님은 학부형이 내미는 봉투를 받아 적힌 이름을 훑어보고 서랍을 열어 던져 넣었다. 고맙다고 인사는 했지만 습관적일 것이었다. 서랍 안은 늘 봉투가 그득했다. 때로는 조그만 박스에 가죽장갑이나 넥타이도 있었다. 그런 물건은 귀한 것들이었다.
그 상황은 지금도 선명하게 내 머릿속 상자에 명화처럼 남아있다. 수업시간에 문을 열고 들어와 선생님께 봉투를 주고 가는 순영이 엄마는 매일 학교 출석이 정확했다.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봉투를 뜯어 돈을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안에는 명단과 함께 돈이 들어있는 것은 나같이 눈치가 없는 아이들조차 뻔히 아는 사실이었다. 누군가를 노골적으로 예뻐하고 칭찬하는 것은 그 돈의 액수와 비례한다는 것도 다들 알고 있었다.
나도 내 어머니가 봉투에 돈을 넣는 것을 보았고 그 봉투가 순영이 엄마에게 전달되고 그 봉투가 선생님의 서랍에 가득 쌓이는데 함께한다는데 이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봉투가 얇았던지 선생이 나를 특별히 예뻐해 주거나 중요한 심부름을 시키는 순간은 결코 오지 않았다.
순영이 엄마는 사친회장으로 매일 부모로부터 돈을 걷어 선생에게 갖다 주었다. 그날 엄마도 순영이 엄마에게 주라며 봉투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날 하필이면 순영이 엄마가 오지 않았다. 그 봉투가 하학 때까지 내 가방 안에 있었다. 하학 길 노점상에서 갓 튀겨낸 오징어의 고소한 냄새는 내 양심 따위와 견줄 것이 못되었다. 순간 봉투속의 현찰을 꺼내든 것과 함께 이미 오징어튀김은 초간장과 함께 내 입속에 들어와 있었다.
봉투 안에서 몇 장 꺼내도 큰 차이는 안 날 것이고 어른들이 감쪽같이 속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날 순영이 엄마를 봤을 때는 다소 겁이나 모자란 돈을 채워 드려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학 길에는 너무나 아이들을 유혹하는 상점들이 많았다. 도톰했던 봉투는 매일 얇아지면서 나는 뻔뻔스러워졌고 어른들을 속일 수 있다는 자부심까지 생겼다. 쓴 돈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생각은 잠시, 재간이 없다보니 쇼핑하는 재미가 양심을 덮어버렸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엄마와 순영이 엄마가 학교에 나타나면서 내 범죄는 들통이 났고 “순영이 엄마 드리라고 준 봉투는 어쨌니? 하는 엄마의 다그침과 빨리 그 봉투를 내놓으라며 노려보는 순영이 엄마의 눈빛에 나는 자지러지고 말았다. 그날 밤 엄마의 귀가를 기다리며 오들오들 떨던 기억은 얼마나 장렬했던지 분명히 회초리 매를 맞았을법한 상황이었음에도 그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엄마는 그 후 내가 탕진해버린 돈을 채워서 직접 순영이 엄마에게 주었고 나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던지 내게 봉투를 맡기지 않으셨다. 그 후 순영이 엄마가 선생님께 고해 바쳐서 나는 범죄인 취급을 받았다. “그건 범죄 행위야” 선생님이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일갈했다. 그 눈은 무섭지 않았지만 엄마에게 신뢰감을 잃은 상실감과 무섭던 기억은 맛있던 오징어 튀김과 함께 아프게 남았다.
뇌물을 준사람, 받은 사람, 가로챈 사람. 법적으로 따져본다면 누가 가장 중한 범죄자인지 나는 모른다. 단지 그 일로 인해 어린아이의 가슴에 박힌 평생 잊지 못할 공포의 크기는 중범죄인의 수위라고 해도 될 것이다. 나는 지금도 뇌물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가로챈 행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짓이라고는 하지만 혼자만 범죄인 취급을 받은 것은 어쩐지 억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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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영 병원근무/티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