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의 인생과 인간의 향기

2017-05-25 (목) 12:00:00 이종열/페이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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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여행이 확인해준 교훈

러시아 여행 중 모스크바와 세인트 피터스버그 사이의 인터넷 접속도 힘든 볼가강 유역 시골에서 일주일 넘는 기간을 보냈다. 한국 대선결과 발표도 그 사이에 있어서 시골 작은 마을의 카페에서 사흘 전 끝난 선거결과를 들었는데, 모두가 예상했던 후보가 당선되었다는 걸 빼고는 별 감흥도 없었다.

사실 요즘은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고 세 계도처에서 별 희한한 정치인들이 나타나서 시끄럽게 정치판을 만드는 게 유행이라 필자는 민주주의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중이다.

민주주의는 좋은데 가장 그 시대의 유능한 후보를 뽑는 게 아니라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찍고 싶은 후보를 뽑는 제도 같다. 러시아인들이 자기들 정치제도를 풍자하다가 미국도 어떻게 더 표를 많이 받은 힐러리가 안되고 트럼프가 당선 되었느냐고 물을 때는 설명할 의지도 별로 없었다.


우리 보통사람들,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대통령에 누가 되는지 정말 영향이 있는가.

단연코 말씀드리는데 선거결과는 복덕방 할아버지들과 저녁 친구들의 술판의 안주감이 될 수 있을지언정, 당선인 옆에서 한자리하거나 딜 한건 할 수 있는 소수 그룹을 제외하고는 보통사람들의 인생과는 상관이 없다. 입에 거품 물고 싸울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리고 색깔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그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젊은 시절 거의 모든 피 끓는 젊은이들이 그러하듯이 필자는 진보였다. 왼쪽에 있었다. 세월이 가면서 많은 보통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상식적으로 오른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다. 그런데, 한국에 가보면 필자의 주위에는 왼쪽에 있는 친구들과 지인들의 숫자도 아직 상당한 걸 보면 우리 사는데 좌든 우든 그때 상황대로 그렇게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이지 별게 아니라는 것을 세월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좌와 우가 문제가 아니라 좋은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그 인간의 향기로 우리가 살아간다는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러시아 여행에서는 도시와 시골에 똑같이 일주일씩 있으면서 제정러시아와 볼셰비키혁명이 어떻게 그곳에 파급이 되어왔는가 궁금했었다. 그런데 그런 공부보다도 더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간들은 어디에서나 인간의 향기를 필요로 하고 그것을 찾아서 살게 된다는 철칙을 다시 배우게 된 것이다.

우리 세대 거의 모든 이들이 그러했듯이, 필자도 냉전시대의 영향과 분단국가에서 태어나 자란 배경 때문에 러시아에 대해서 부정적 인상을 가지고 지낸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는 6.25때 탱크를 북쪽에 공급해준 곳이었고 색깔이 빨간(러시아에서는 “붉다”는 표현이 “좋다”는 뜻으로 통하고 있었다) 거친 인간들이 살고 있는 험한 나라였다.


미국에서 오래 살면서도 존 매케인 상원의원처럼 “러시아는 거대한 주유소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매파들의 얘기도 일리가 있게 들렸었고, “악의 세력”이라고 규정했던 레이건 대통령의 러시아 레이블링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필자는 러시아를 좋지 않은 곳으로 여겨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 러시아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와 푸시킨을 가진 나라였다. 차이코프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음악을 우리에게 준 나라였다. 그리고 4,200만 명이나 되는 생명을 내전으로 잃고도 진정한 민중들의 붉은 혁명을 완수한 나라였고,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쳐들어왔다가 참담히 패배하고 망하게 만든 불패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도 연합군이건 반대쪽이건 할 것 없이 가장 많은 생명을 잃은 나라도 러시아였다.

직접 가서 보고 같이 지내고 하다가 보면 러시아인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은 기상이 굳건해서 멋있고, 잘생겨서 멋있고, 너무나 이방인에게 친절했다.

자기들이 해외에서 좋지 않은 인상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어떻게든 “우리가 사실 나쁜 사람들인 것은 맞지만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란 것을 해학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정말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기회 있을 때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해줄 많은 얘기가 있다. 어쨌든 우리는 인간의 향기가 있는 곳에서는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확인이 된 셈이다.

<이종열/페이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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