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사무실이 광화문 네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대는 매우 익숙한 나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광화문(光化門)은 서울에 가 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문재인 새 대통령이 “나는 광화문 대통령이다”고 자처하며 더욱 유명해졌다. 촛불집회가 광화문에서 열렸고 거기에 촛불을 들고 시민들과 함께 섰던 문재인 씨가 대통령이 되었다. 광화문통(通)은 서울의 중심가이다. 거기에 중앙청사, 경제기획원, 동아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등 언론사들과 옛 국회 의사당, 서울시청 남대문 서울역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중요한 기관과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광화문은 태조 4년 즉 1935년에 경복궁과 함께 건조되었다. 광화문 광장은 일명 서울광장이라고도 불리고 대부분의 큰 모임이 여기서 개최되었다. 삼일절 기념행사, 세월호 참사 추모회, 시민음악회, 촛불집회와 4,19 학생시위로 세상을 바꾸어 놓은 곳도 바로 광화문통이다. 그 곳은 서민들과 학생들이 자유를 외치던 곳이고, 힘에 항거하여 싸우던 전쟁터이기도 하다.
예수는 30세에 열 두 제자를 선택하고 첫 설교를 함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였는데, 의사이며 역사가였던 누가는 그 때의 상황을 “예수께서 평지에 섰다.”(누가복음 6:17)는 특이한 표현을 하였다. 예수가 선 땅을 평지(平地)였다고 구태여 밝힌 은 낮은 자리, 곧 서민의 위치에서, 서민의 친구가 되어 전도를 시작하셨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평지는 그리스어 원어성경에는 ‘페디논’인데 아주 낮은 땅을 말한다. 실제로 그 때 예수 곁에 모여든 사람들은 병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귀신에 사로잡혀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기술되었다. 경제적인 상류가 아니라 서민 곧 중하류의 사람들 속에서 예수는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예수가 선택한 제자 열 두 명은 대부분 노동자 출신이었다. 결국 예수는 약 3년 동안의 짧은 사역을 마치고 제사장 등 종교계의 상류층과 빌라도를 위시한 정치계의 상류층에 의하여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된다.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는 첫 설교에서 축복한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 주린 자들, 우는 자들, 미움을 받고 사람들에게 격원시(隔遠視) 당하는 사람들이었다.(누가복은 6:20-23) 그런 뜻에서 예수가 전한 복음은 ‘평민의 복음’이었고, 목수의 아들 예수는 끝까지 서민으로 살다가 죽었는데, 그가 십자가에 달린 곳도 ‘문밖’이었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브리서 13:12)
죽은 예수의 사체에 당시의 장례 법도를 따라 향유를 바르려고 평소 예수를 따르던 막달라 마리아를 위시한 몇 명의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을 때 그녀들은 무덤이 비어있음을 알게 되고, 그 자리에 천사가 나타나 예수의 부활을 알리며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말씀을 전달한다.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마가복음16:7) 즉 이제부터 너희가 시작할 복음의 출발점(교회의 출발)은 ‘갈릴리’라는 당부였다.
갈릴리 지방은 예루살렘 북쪽, 유명한 사해(死海) 서쪽 일대를 가리키며 예수 당시 혼혈족이 산다고 하여 유대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멸시하였다.
예수는 그의 교회가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 예루살렘이 아니라 멸시받던 땅 갈릴리에서 시작되기를 희망하셨던 것이다. 기독교의 이론을 정립한 바울은 갈릴리를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로 표현하였다.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어느 지방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됨’을 말하며 그것이 곧 기독교가 믿는 신앙으로 해석하였다.
흔히 말하는 구원은 곧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한다. 다소 신비하기 때문에 철학에서는 ‘신앙신비주의’라고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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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