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머니를 회상하며

2017-05-12 (금) 박승균 뉴욕주립대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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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아무리 위대하다 한들 어머니만큼 더 위대한 인물이 있을까. 매년 어머니날이 되면 어머니가 유독 생각난다. 어머니!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찡하고 아려온다. 어머니가 가이없이 우리 자녀에게 베푸신 은혜에 비하면 해드린 게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머니! 나의 어머님은 특히 기력이 좋고 힘도 좋으셨지만, 무엇보다 정신력이 대단하셨다. 신앙도 매우 깊고 일단 결심하신 일이면 뒷걸음질하는 법이 없으셨다. 어머님은 또 남달리 정이 많으신 분이었다. 어머님의 사랑은 끝이 없었다. 자식들이 자랄 때, 늘 말씀하시기를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하시면서 우리 오남매를 다 똑같이 사랑하셨다.

어머님은 우리들을 엄하게 키우셨다. 특히 거짓말하는 것을 용서치 않으셔서 나도 회초리 세례를 여러 번 받았다. 그것은 사람의 도리를 지켜서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려는 지극한 사랑이셨다. 우리 집의 훈육부장은 아버님이 아니고 어머님이었다.


우리 어머님은 음식솜씨가 대단히 좋으셨다. 우리들 생일에는 떡 벌어진 생일상을 차려놓고 많은 우리 친구들을 초대하게 하셨다. 친구들이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어머니의 음식솜씨를 칭송하는 바람에 어머님은 한껏 기쁘셨고, 굶주린 친구들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얻으셨다.

옛날에는 많은 어머님들께서 다 경험하셨겠지만, 내 어머님은 고생도 많이 하셨다. 일제말기에는 배급 쌀이 떨어질 때마다 끼니를 걸러야 할 때도 있었다. 내가 여섯 살 쯤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저녁, 어머님께서 나의 손을 꼭 잡으시고 쌀이 떨어져서 “오늘 저녁은 우리 둘이서 같이 굶어야 되겠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님은 큰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셨다. 나는 그때 어머님의 간절하고 숭고한 사랑을 몸으로 느꼈다.

어머님은 일면 참 행복하셨던 분이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조그만 일에도 어머님은 쉽게 흥분하시고 기뻐하셨다. 자동차로 뉴욕을 여러 번 간 일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차만 타시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을 보고 감격하셨고 지나가다 소나무만 보아도 좋아하셨다.

그런 어머니께 뼈에 사무치는 아픔이 있으셨다. 둘째아들 승호가 등산중에 조난사고로 19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어머님은 그날로부터 가톨릭 신자가 되셨고 늘 주님께 기도드리면서, 언젠가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시던 그 아들 곁으로 가게 되기를 염원하셨다. 얼마전 주일, 드디어 어머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어머니를 불러가셨다. 지금 어머님은 사랑하는 아들과 또 연전에 작고하신 우리 아버님과 함께 주님의 은총 속에서 평화와 안도의 미소로 자식들을 환히 내려다보고 계시리라 믿는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박승균 뉴욕주립대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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