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소풍

2017-05-05 (금)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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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비행기 안에서 한잠도 못 자고 열네 시간을 날아가는 멀고도 먼 소풍 길이었다. 설레는 마음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육체적 버거움을 떨쳐 낼 수 없었다. 해를 더할수록 장시간 비행기 타는 일이 예전 같지 않다는 나이든 이들의 말을 귓전으로 흘렀던 자만심이 가차 없이 무너져 내렸다. 뒤척인 자리에서 따끈해진 온기가 가슴으로 전이되었다가 머리까지 올라 피로감은 점점 더해갔다. 어둑한 기체 안에 희미한 등을 켜놓고 무릎 위의 책장을 대충 넘기듯 지루한 시간을 겅중겅중 건너뛰고만 싶었다.

비행기 바퀴가 땅에 닿는 순간 지루하기만 했던 시간도 거짓말처럼 멈췄다. 여행은 그런 묘미가 있어서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그리웠던 계절과도 같은가보다. 싱그러운 봄날에 고국을 찾은 적은 없다. 옹기종기 꽃들의 무리가 화관을 안겨주고 푸른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는 일렬종대로 반듯이 서서 환영의 깃발을 흔들었다. 언제든 찾아가면 옹달샘처럼 그 자리에 있어 주는 오래된 친구들과 편하게 맞아주는 친척이 있어서 머무르는 동안 나의 피톤치드 수치는 수직으로 상승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든가 이번 여행에는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하여 바쁜 일정을 더디게 했다.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 서둘러 지하철을 타러 나가다 왼쪽 발이 바깥쪽으로 뒤집어지면서 발목을 심하게 삐고 말았다. 시차로 인해 잠자야 하는 시각에 잠을 설쳐 균형 감각이 무너진 탓일 거라며 나를 위로했다. 운동도 꾸준히 해왔고 급한 성격도 아닌 나여서 씁쓸한 기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사건이 하필 여행길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기만 했다.


몸은 나이를 말해 주는 신호 같다. 비행기 안에서도 얼마나 뒤척였던지 오래된 청바지 뒷주머니 양쪽 아래가 헤어져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찢은 청바지가 되어 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부정적 의미를 가장한 알맹이 빠진 화려한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머물렀다. 발에 깁스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충고는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 두었다.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뒤뚱거리며 정해놓은 스케줄을 강행했다. 통증이 심해져서 몇 차례 한의원을 찾아 침을 맞고 압박붕대를 칭칭 감은 채 달음질치는 시간 위의 곡예사가 되어있었다

그 편치 않은 발로 남쪽 지방 여행을 나섰다. 꼬막의 고장 벌교에 있는 소설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 문학관을 방문했다. 굽이굽이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매실의 원조 격인 홍쌍리 마을에 이르니 노곤한 하루해가 저물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홍쌍리 여사가 미소로 지켜보는 가운데 하루를 내준 지인과 그의 부인 그리고 동생가족과 함께 달고 시큼한 매실차를 나누었다 하룻밤을 시골의 한적한 호텔에서 머물고 이번 여행에 함께한 여동생의 집안일로 광주에 들렀다가 서울로 돌아가야만 했다.

바쁜 일정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미 두 번을 만난 친구들의 끈질긴 요청이 있었다. 서울을 떠나기 전날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야 했다. 자녀가 성장하고 또 출가한 자녀가 있는 내 나이에는 건강문제가 이야기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열심히 운동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챙기며 나이보다 젊게 살려고 애쓰게 마련이다.

이해의 폭도 넓어 친구 여섯이 함께 하루를 보내도 서로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내가 발을 다쳐 뜻 깊은 1박2일의 남쪽지방 여행이 순탄치 않았다고 자책하던 중에도 40년이 되어 가는 우정은 나이만큼 깊어가고 있었다. 서울 외곽의 한적한 음식점에서 점심을 나누고 그 곳 정원에 마련된 야외 카페에서 이별을 연습했다.

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객지에 발을 들여놓은 소풍이었다. 내 인생의 어디쯤 보일락 말락 한 점 하나를 찍어 놓고 있었던 자리로 돌아왔다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어느 시인이 해맑게 웃으며 읊었던 한 구절의 시가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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