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는 신(神)이 아니다.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었다. 블교에 대해서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불교”하면 “아, 무소유!”하고 한 마디씩 한다. 무소유(無所有)는 스님들한테 해당되는 말이지, 우리 같은 재가불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우리말 팔만대장경’ (법화-열반부 816쪽, 국민서관 발간)에 보면, 부처님은 ‘춘다’의 동산에서 일반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생업에 종사하여 부지런히 돈을 벌고, 검박하고 절제 있는 생활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돈을 벌어서 부모를 봉양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고, 친척을 도와주고, 친구를 보살펴주고, 손님을 접대해주고, 그리고 집에서 일하는 종들에게도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국가에 세금도 잘 바쳐야 한다. 이렇게 하면 현세에는 힘과 빛과 부(富)와 이름을 얻고, 죽어서는 복(福)을 얻어 천상과 같은 좋은 곳에 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노병사(老病死), 늙어지고, 병들고,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서, “왜 인간은 늙고 병들고 그리고 죽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점 앞에서 괴로워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는 산속으로 들어가 6년 동안 수행을 한 결과 ‘연기법(緣起法)을 깨치셨다. 모든 만물은 인연 따라 항상 변해가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무상(無常)인 것이다.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린 아이는 항상 어린 아이일 것이고 그리고 노인은 항상 그대로 노인일 것이다. 죽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물은 항상 변해가니까 무상인 것이다. 인간은 항상 변해가니까 무아(無我)인 것이다. 무상이고 무아이기에 고(苦:괴로움, 고통)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연속성’을 말한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기에, 태아가 어린 아이가 되고, 어린 아이가 성인이 되고, 성인이 노인이 되고, 노인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 ‘나’라고 생각되는 ‘나‘가 변해서 다른 ’나‘로 변해가는 것이다. 무상이고 무아이기에 생사(生死)가 윤회한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기의 업(業; Karma)을 만들어간다. 업에 따라, 다음 세상에, 동물로 혹은 지옥으로 혹은 인간이나 천상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업에 따라 복 많은 인간으로 태어나든가, 혹은 지지리도 복 업는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복 많고 건강하고 총명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으면 좋은 업을 지어야 한다. 좋은 업을 짓기 위해서는 우선 오계부터 지키면서 생활하는 것이다. 오계란 살생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술 마시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의 오신 날’을 맞이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흥미를 가져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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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내 법사·컬럼비아 의대 임상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