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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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미학

2017-04-28 (금) 최동선 전 커네티컷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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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미국에 정착한 후 20여년을 같은 타운에서 살았다. 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가장 낯선 것 중의 하나가 이웃을 만나기 어려운 주거 환경 이었다.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보일 듯 말듯 숨어 있는 집들은 낯선 땅에서의 적응을 더디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었다.

한국의 아파트라는 공동 주거문화에?익숙했던 우리들에게 이곳에서의 초창기 생활은 고향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심리적 거리만큼이나 깊은 두려움을 느끼게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수없이 지나간 길을 따라 익힌 동네 곳곳의 작은 골목길까지도 오래 입은 남색 자켓처럼 편안하다. 아마 가끔씩 방문하는 고국의 문화가 점점 낯설어져 감을 느끼게 된 무렵인 것 같다.

한국은 전국이 급속도로 도시화 되었다. 서울과 지방의 경계도 모호하고 어디를 가나 똑같은 획일화된 느낌은 낯선 공룡과 마주한 듯 했다. 산중턱을 깎고 들어선 아파트, 물 위를 가로 지르는 상가는 도시화의 과정이라고 하더라도 골목마다 들어선 커피점이며 식당들은 더 이상 가슴속에 묻어 둔 고향의 풍경이 아니었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의 사고와 가치는 이미 내기 기억하고 기대하는 고유한 우리네 정서도 아니었다.


한국의 변화에 비하면 이곳은 느려도 너무 느리다. 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 길 건너편 집의 하얀 목련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봄을 맞고 있었고, 주인집 노부부는 베란다의 오래된 의자에 그림처럼 앉아 햇빛을 즐긴다. 20여 년 전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던 길은 시간이 정지된 듯 그대로다.

물론 이 작은 마을에도 유행은 상륙하며 비디오 가게 대신 스타벅스가 들어서며 투명한 유리창 밖까지 커피향이 풍겨 나온다. 오래된 다이너 자리에는 현대식 시설을 갖춘 도시풍의 빵집이 들어섰고, 각종 꽃나무들을 팔던 길가의 허름한 꽃집은 새로운 집들이 들어서려는지 크고 작은 묘목 대신 땅 고르기가 한창이다.

내가 여행 중에 머물고 쉬었던 장소가 구글 지도에 그대로 표시되는 세상, 버튼 하나만 누르면 모든 세상의 정보가 손안에 들어오는 디지털시대이다. 그러나 나는 출근길에 같은 장소에서 커피를 사고, 퇴근길에 같은 주유소에 차를 세운다.

같은 얼굴이 커피를 건네고 늘 내일 은퇴하겠다고 말하는 주유소 주인의 인사를 수년째 들으며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어쩌다 한 번씩 가는 동네 하나 뿐인 PUB 에서는 주문하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맥주 한잔을 테이블에 말없이 가져다주는 주인이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 이 익숙함을 편안함이라고 읽고, 또 쓴다.

최근 들어 사람들은 미니멀 라이프에 열광한다고 들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소비중심 사회에 살며 어느 시대보다 풍족한 생활을 하는 현대인이 필요 이상 지니게 된 물건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단다. 물론 단순히 적게 소유한다는 개념보다는 행복을 위해서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고, 삶에서 불필요한 것을 걷어 내고 가치 있는 것을 채우는 사람이 늘어 간다니 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도 배워 두어야 할 일이겠다.

물론 물건 뿐 아니라 낭비되는 시간, 돈, 에너지 등의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니 현명하게 사는 법 또한 참 어려운 것 같다. 며칠 전 산티아고 순례를 시작한 지인이 SNS에 올린 사진 몇 장을 보았다. 문명의 진보는 끝이 없고 욕망의 진화만큼 복잡해진 세상에서 모든 편리함을 포기하고 그 길을 걷게 하는 힘은 과연 무엇일까? 매일 똑같은 일상이 주는 단조로움과 일에 치쳐 힘든 순간에, 어디론가 떠나 힐림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왜 하필 홀로 떠나 낯선 순례자가 되는 길을 택했을까?

이 순간에도 천천히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며 뚜벅뚜벅 걷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부럽기만 하다. 복잡한 물질문명을 피해 단순한 삶의 방식을 택하며 얻는 자유로움, 행동을 행복으로 만드는 꿈, 언젠가 나도 천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힐링의 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로 떠나는 그 꿈을 꾼다.

<최동선 전 커네티컷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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