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향을 생각하며…

2017-04-21 (금) 김갑헌/ 맨체스터대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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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학생 때였으니까 벌써 옛 일이 되었지만 친구들과 이태리 남쪽의 시실리 섬에 간 적이 있다. 시라쿠사(Syracusa)의 해변에 한 무리의 노인들이 흥겨운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지나가는 우리를 푸짐한 음식과 포도주로 환대하였다.

모두 유창한 영어를 하기에, 어떻게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지 물었더니 이태리 계통의 미국인이라는 대답이었다.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해서 살다가 아들 손자 모두 출가한 후에 고향으로 은퇴한 사람들이었다. 좋은 일 궂은 일 안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농경사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외국으로 이민하는 경우, 대체로 나이가 들면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낯 선 외국에서 비바람 눈서리를 다 견디며 이제까지 지고 온 인생의 무거운 짐을 푸근한 고향에 돌아가 풀겠다는 마음을 누가 탓할 수 있으랴.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이 영탄조의 한국 유행가도 가슴 속에 자리 잡은 고향에 가고 싶다는 본능 (歸巢本能)을 나타낸 것일 것이다. 삶이 피곤 할수록 향수는 짙어지고 나이가 들수록 돌아가고 싶다는 그 생각이 또한 깊어지게 마련이다.

여름이 오면 거의 모든 한인들은 한국을 생각하는 것 같다. 나의 아내도 오는 여름에 또 한국에 다녀오겠다고 한다. 나와 아프리카 여행이나 가자고 권했지만 일편단심 변함이 없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 나는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거의 한 적이 없다. 올 여름에는 한 번 다녀올까 생각도 했지만, 촛불 데모대에 휩쓸리는 한국사회의 혼란을 보고나니 그 생각도 다 없어져 버렸다. 아내 없는 집을 혼자 지키게 된 셈이다. 유럽에 사는 조카들이나 잠시 보고 올 생각중이다.


고양이는 장소에 집착하고 개는 사람에 집착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여름이면 한국에 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장소와 사람 어디에 더 집착을 하는 것일까?

몇 년 전 고향이 그리워 고향을 찾은 적이 있다. 찾은 그 고향은 예상대로 내가 알던 그 고향은 아니었다. 젊은이들은 다 떠나버렸고, 동네의 이장이라는 분은 월남에서 시집온 40대 후반의 여인이었다. 내가 자랐던 과수원 터에는 커다란 사료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산천은 의구 (依舊)하되 인걸 (人傑)은 간데 없네”라는 길재의 시조가 전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산천도 인걸도 모두 사라진 고향… 무엇이 고향을 고향으로 만드는 것일까? 사람일까? 사람을 찾아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는 어느 나라에나 많이 있다. 떠난 연인을 기다리는 쏠베지의 노래(Solveig’s Song)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실제로 돈을 벌기위해 천만리 외국에서 평생 방랑하는 그 연인 피어귄트(Peer Gynt)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도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일이 다 지나 나이 늙고 병들어 돌아온 피어귄트를 할머니가 된 쏠베이지가 맞아들이는 드라마는 결국 돌아갈 곳은 사람이요 인걸 (人傑)이라는 뜻이 아닐까?

장소일까? 어느 독서그룹에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노래를 영어로 번역 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옛적에 부르던 노래를 다시 여러 번 반복해서 불러보았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천지에 날리던 그 곳, 그 고향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그 고향의 꽃 대궐들이 다 사라져 버린 곳에 기다리는 사람조차 없다면 고향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여름이 되면 고향에 간 아내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빈 집을 지키는 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내일 새벽 고향에 간다는 친구 부부를 또한 생각했다. 유나이티드 에어(United Air)를 타고 간다니 오버 북킹으로 끌려 내리는 불상사 없이 정든 고향에 가서 정든 친구들을 반갑게 만나기를 기원한다.

<김갑헌/ 맨체스터대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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