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꿈꾸는 자들을 위한 변명

2017-04-19 (수) 한영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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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에 반대하는 분의 얘기를 듣다가 그 이유에 놀란 적이 있다. 역대 대통령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재직시 부정한 돈을 챙겼는데 왜 박근혜 전 대통령만 그러면 안 되느냐는 거였다. 그분들이 대통령과 무슨 이권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정을 척결하겠다는 걸 그렇게도 반대하는 이유가 처음엔 이해가 안 됐다.

곰곰이 생각하니 이 문제만을 놓고 본다면 그것은 결국 희망을 품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보였다. 부정축재는 결국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한 사람만 억울하게 만들면 안 되겠다는 합리가 존재하고, 반대쪽에선 그래도 이참에 정화해보자는 희망의 기치를 높여 촛불을 든 것은 아닐까.

희망을 시제로 구분하자면 미래일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들. 정말 오게 될지 안 오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들. 꼭 붙들고 끊임없이 기리며 지치게 기다려 보아야 하는 것들. 그래서 그것은 어쩌면 믿음의 한 형태일 것이다. 터무니 없을지도 모르지만, 바라고 꿈꾸는 미래 어느 시점의 밝은 현실에 대한 믿음이 곧 희망일 것이다. 미래를 믿지 않으면 희망은 품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식들의 세상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희망. 과거엔 그랬어도 이제 더는 안 된다는, 이제는 정말 원칙과 정의로 나아가자는 희망. 그런 희망들이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왕권도 그런 희망에 의해 무너졌고, 흑백 평등도 그런 희망에 의해 용감히 선언되었다. 남녀 평등도, 인권도, 종교의 자유도 다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면 불확실한 희망을 믿고 피흘리는 자가 곧 세상을 바꾸는 자들임에 틀림 없다.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자리에서 물러난 오바마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이렇게 외친 바 있다. “다른 사람, 다른 때를 기다린다면 변화는 결코 오지 않는다. 우리가 기다려 온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변화다.”
우리 아이들 세대 만큼은 이런 사회, 이런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 꿈, 그것이 실현되기를 염원하는 소박한 희망이 곧 변화를 이끌어 내는 믿음이 되어 줄 것이다.

<한영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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