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예수의 꿈

2017-04-15 (토) 김근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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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목련꽃 피는 봄과 일치되는 것엔 일맥상통하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re) 살아난다(surrection)는 부활의 합성어는 우리 삶속에 밀접하게 녹아있는 단어이다.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고 했듯이 우리도 날마다 밤이면 죽고 아침엔 다시 일어나는 축소된 부활의 연속성 속에 살고 있다. 부활이 잠에서 ‘다시 일어나다’는 의미도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젯밤 무슨 꿈을 꾸며 일어났는가 하는 잠의 질(質)의 문제이다.

역사의 발전은 인류가 밤에 꾼 그 꿈을 낮에 실현시킨 집요한 노력의 결과이다. 프로이드는 그의 저서 ‘꿈의 해석’에서 실제로 꿈에는 의미가 있으며 학문적 해석이 가능하다. “꿈은 억압되고 억제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이다. 고로 현재의 억압과 고난이 소원성취 된 것으로 보여주면서 우리를 미래로 인도한다”고 주장하었다. 때문에 부활이 주는 현실적 의미는 예수의 부활에는 삼일간의 꿈이 있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꿈은 다시(re)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will)가 담겨있다. 예수가 꾼 꿈은 불순종으로 실락원한 아담과 이브를 다시 복락원으로 환원시키기 위한 꿈이었다. 이것이 예수부활의 당위성이다. 요나가 3일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 니느웨로 도전하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요, 물고기 잡는 제자들을 다시 사람낚는 어부로 전환시키기 위한 꿈이요, 엠마오로 피신하는 두 제자를 복귀케 하는 꿈이었다.


현대인의 병, 불면증의 주된 증상은 꿈을 꿀 수 없다는 병이다. 그래서 불면증은 밤이 없는 낮만 존재하고 꿈을 모두 상실해 버린다. 역사적 예수의 부활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무덤이란 공간속의 제3일이란 시간은 시공을 초월한 부활의 꿈을 꾸는 것이고 ‘내가 그 일을 다시 하리라’는 사명감이 함축되어 있다.

예수의 부활은 사상가 톨스토이의 부활, 작곡가 말러의 부활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기독교사상이다. 죽어서도 다시 살고픈 인생의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부활의 장본인이신 예수도 죽은 나사로를 살린 ‘부활’을 통해 자신의 부활의 그림자로 승화시킨 셈이다.

잔인한 인생의 죽음의 계절 4월에 희망의 부활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꿈꾸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도 예수와 같은 꿈을 꾸고 resurrection 하자!

<김근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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