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아 있을 때…

2017-04-17 (월)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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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는다. 영원히 살 수 없다. 죽으면 그냥 끝이다. 인간의 단멸은 상식적 관찰이다. 불신자들은 천당과 지옥의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죽음은 호흡이 멈춘 그 순간부터 육신도 생각도 멈춘다고 여긴다. 죽음은 인생의 영결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유다.

사람은 죽으면 육신은 사라져도 영혼은 살아남는다. 영혼이 사는 저 세상이 있다. 저승이란 사후세계를 믿는다. 종교적인 관찰이다. 신자나 성도들은 극락, 천국, 연옥, 지옥 등을 얘기한다. 이승에서 예수와 부처 등의 가르침대로 바르게 살면 사후 편안하고 좋은 곳에서 살수 있다고 여긴다. 살면서 튼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살다 죽기 마련이다.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궁금증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제각각일 뿐이다. 저승의 유무에 생각이 다르다. 종교에 따라 사후세계에 대한 견해도 서로 다르다.


과학에서는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과학은 인간의 정신활동은 뇌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뇌가 죽은 이후에도 정신이 유지된다는 주장은 부정된다. 과학적으로 사후세계는 입증 불가능한 얘기일 뿐이다. 사후세계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 없는 종교상의 개념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인간의 뇌는 부품이 고장 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와 같다. 고장 난 컴퓨터에는 천국이나 사후세계는 없다‘며 ”사후세계와 같은 것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죽음 이전의 삶을 마음껏 영위해야 한다“며 현실을 가치 있게 살아가라고 권한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죽음에 대해 아직 사는 것도 잘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아느냐”며 인간의 죽음을 종착지로 봤다.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남아서 세월이 흐르면 다른 만물과 같이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내세는 없다는 것이 유교의 교리인 셈이다.

불교의 사후세계는 전생에 윤리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면 좋은 모습으로 태어나고, 악하게 살면 나쁜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윤회설이다. 윤회설의 결과는 꼭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바르게 살지 못하면 짐승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요,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다. 원불교는 영혼은 바로 ‘마음의 조화’라고 여긴다. 지옥과 극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먹기 달렸다’는 것이 원불교의 견해라 할 수 있다.

개신교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은 천당에 가고 안 믿는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고 한다.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요 구원인 것이다. 성도들이 죽은 후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 썩지만 영혼은 하늘나라로 올라가 영원히 사는 ’사후 천국행‘을 구원이라 생각하는 이유다.

가톨릭의 사후세계엔 천국과 지옥뿐만 아니라 연옥도 있다. 연옥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영혼이 정화되는 곳으로 하늘에 이르는 여정의 최종 단계다. 이승에서 살아있는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와 희생에 따라 천국을 갈 수 있는 천국에 이른 영혼들이 머물러 있는 곳인 셈이다.

저승에 관한 견해는 제각각이다. 사후세계를 믿고 있는 불교, 가톨릭, 개신교 등도 그곳에 가는 방법이나 과정은 서로 다르다. 왜 그럴까? 아마도 다녀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스스로가 선택할 일이다. 하지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는 매 한가지다. 저승을 믿지 않는다면 이승에서 한번뿐인 인생 멋지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종교든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느냐에 따라 사후세계에서 모습이 결정된다고 강조한다. 영원히 살게 될 천국과 지옥행은 이 땅에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란 의미다. 살아 있는 ‘지금 여기’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다. 살아 있을 때…좋은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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