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재미있는 소식이 최근 ‘종교뉴스’지에 보도되었다. 워싱턴 주립대학생 체스터 로브슨 군이 성 프란시스의 흉내를 내봤다. 갈색 옷을 걸치고 빗물에 세수하고 구걸하여 먹고 가난한 아이들의 발을 씻어주고 창녀나 마약 취급자와 대화하고 공원에 앉아 나무의 새들에게 중얼중얼 설교를 하였다. 그는 이틀 동안에 두 번 매를 맞고 경찰에 붙들려 정신병원에 호송되었다.
로브슨 군이 소감을 말했다. “지금은 예수도 성 프란시스도 나오기 어렵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미국 거리에 나타나서 술을 즐기고 창녀와 죄인들과 어울려 다니고 공중의 새를 보라고 설교한다면 기독교인들이 먼저 나서서 그를 잡아 정신병원에 넣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자체의 개혁운동을 주도한 ‘예수회’(제스윗)의 모토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세계 어느 곳에나 시체처럼 운반될 것이며 맹인의 지팡이처럼 사용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리라.” 어떤 희생을 지불하더라도 예수님 계신 곳에 있겠다는 각오이다.
뽕나무 위에서 예수를 멀리 관망하던 세무서장에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누가복음 19:5)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가 구경꾼이 아니라 친구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중풍병자를 예수 곁에 운반하고자 남의 건물 지붕을 뚫은 자들을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마가복음2:5) 치유하셨다고 한다. 지붕을 파괴하는 방법은 과격했지만 친구를 예수 가까이로 인도하려는 마음을 예수는 믿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위치는 어떤 곳이었나? 예수는 로마의 앞잡이며 동족 반역자인, 세무서장 삭개오의 집에 계셨고, 여섯 남자를 편력하여 손가락질 받던 창녀의 집이었으며, 군대라는 이름의 귀신에 사로잡힌 미치광이가 묶여있는 공동묘지에 계셨고, 권력자들에게 선동되어 예수를 죽이고자 몽치를 들고 몰려오는 감람산이었으며, 억울한 재판정과 사형장 골고다였다.
예수가 가신 곳은 굶주린 민중이 있는 광야였고, 38년간 일어서지 못하는 신체장애자가 희망 없이 누워있던 베데스다 호수였으며, 풍랑 속에 구원을 청하는 갈릴리 바다였고, 간음한 여인의 민중즉결재판장이었다. 성경 속의 그리스도 상은 중세기 유럽이 부각한 금관을 쓴 예수는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인간해방이 필요한 장소에 나타난 해방자 예수였다. 육신의 질병과 악령(惡靈)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풀어주시며, 고독한 노인과 율법에 갇힌 자들을 해방하시고, 죄책에 신음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알려 주심으로써 영적인 해방을 선언하셨다.
예수는 인종적으로 차별 받던 사마리아인을 높이시고, 세상에서 저주 받은 강도에게 천국을 약속하셨다. 어린 아이들을 귀중히 여기시고 천대받던 세리(稅吏)와 노동자들을 제자로 삼으셨다. 그런 해방자 예수는 아시아 대륙 동북부에 붙어있는 작은 땅 한 반도에도 오셔서 신식교육, 신식의학, 새로운 문화, 민주주의 등 한 반도를 오랜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예수는 전 세계를 뒤집어 놓은 해방자의 대명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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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