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뷰티플 라이프

2017-02-10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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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독일 베를린에 아들이 있는 친구가 독일 유명잡지 ‘ 슈피겔(DER SPIEGEL)’지의 2월4일자 표지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노란머리에 빨간색 넥타이, 검정 양복차림의 도널드 트럼프가 왼손에는 피묻은 칼을, 오른손에는 피가 흐르는 자유의 여신상의 잘린 목을 높이 쳐들고 포효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표지 오른쪽 하단에는 ‘ AMERICA FIRST ‘ 라 적혀있다. 이 그림은 쿠바계 미국인이 그린 것으로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으로 참수된 자유의 여신상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또, 7일밤 집으로 배달된 13일자 ‘NEW YORKER’ 주간지 표지에는 여신상의 오른손에 든 횃불이 완전히 꺼진 채 하얀 연기가 캄캄한 하늘 위로 피어오르고 있다. 암흑천지인 세상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존 W. 토맥의 ‘LIBERTY’S FLAMEOUT’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미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가 미국에게 선물 한 것으로 횃불이 상징하는 것은 자유이다. 과거 이민자들이 뉴욕 항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은 오른손 높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횃불을, 왼손에는 1976년 7월 4일 독립선언서를 들고 서있다. ‘자유는 세계를 비친다’는 이 상징물이 ’미국 우선주의‘, ’미국인에게 일자리를, 미국제품을 사라‘, ’미국과 멕시코간 장벽을 쌓겠다‘, ’난민과 무슬림 입국 금지하라‘ 등등 트럼프 대통령의 언행으로 수난을 당하고 있다.


지난여름, 키세나 팍에 갔을 때 눈만 내놓고 검정 브루카로 전신을 뒤집어 쓴 소녀 대여섯명이 키득거리며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고 다시 타며 즐기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었다. “ 그래, 이게 미국이지, 바로 미국이야. ” 하며 미국의 넓은 품을 느꼈더랬다. 그런데 이 넓고 깊고, 넉넉하던 미국의 품이 겨우 자신의 몸만 감싸 안을 정도로 쪼그라들고 있다.

수백개의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 다양한 언어가 어우러져 사는 뉴욕에서 세계를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불신과 증오가 지배하려 하고 있다. 미연방법원이 반이민행정명령을 일시적으로 중지시켰지만 여전히 트럼프 행정부의 방향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른다.

문제는 난민위기, 경제성장 둔화, 유럽연합에 대한 환멸로 유럽의 극우세력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점이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했고 독일은 오는 9월 총선에서 이슬람은 독일에 맞지 않는다는 정책강령을 채택한 극우정당의 돌풍이 예상된다. 올봄 대선을 앞둔 프랑스에서는 내셔널 프런트당 마린 르펜 대표가 극우인종차별주의자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출마한다. 대통령제인 프랑스를 극우파가 이끌면 유럽전체가 극우의 물결에 휩싸일 수 있다.
미국을 방문하여 트럼프와 정상회담, 국빈만찬, 골프를 함께 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수년전부터 극우주의자이자 군국주의자로 비난받을 정도다. 시진핑 중국주석은 말로만 자유무역이고 사드 배치 결정이후 한국에 경제 보복을 하는 중이다. 우리는 이미 강렬한 민족주의 색채를 지닌 극우정권이 유럽에 수립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경험이 있다.

지난 주, 전철을 타고 퀸즈에서 맨하탄으로 오고 가면서 사람들을 주의깊게 관찰했었다. 백발의 백인 할아버지는 꼬박 꼬박 졸고있고 히스패닉 청년은 무르팍 곳곳에 맨살이 보이는 바지를 입은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흔들거리고 있다. 흑인 아저씨는 무심하고도 순한 눈빛으로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고 그 옆에 앉은 중국 여인은 가방에서 사과를 꺼내 먹는다. 동구권 같은 중년여성은 커다란 검정 쓰레기백 서너 개를 발치에 놓고 무릎에도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검정 뿔테안경 쓴 한인여성 내가 앉았다.

다소 이민생활에 찌든 남루함이 보였지만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고 아들이고 딸인 이들, 이들의 삶은 눈 오고 비 오고 진땅 마른땅 밟아가며 나름 열심히 인생의 희로애락을 헤쳐오고 있을 것이다. 그냥 이대로 살게 해달라. 합법적인 신분이든, 서류미비자든 각자의 삶은 뷰티풀 라이프(Beautiful Life)다. 드라마 ‘도깨비’의 공유(김신 역) 대사를 빌려 표현하면 “너와 함께 한(나의 인생) 모든 시간이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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