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나 아렌트가 던진 한마디

2017-02-08 (수) 여주영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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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독일의 전범 칼 아돌프 아이히만은 총통 아돌프 히틀러 밑에서 열차에다 가스시설을 장착하고 유대인 수백 만명을 몰아넣어 학살시킨 역할을 주도한 인물로 역사에 남아 있다.

그는 1961년 온 세계가 지켜본 이스라엘 법정에서 재판장이 “당신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정하는가?”고 묻자 “제가 관심이 있는 것은 오로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므로 인성을 포기하고 단지 상부의 명령에만 따랐을 뿐이다. 만약 내가 명령에 불복하고 양심대로 한다면 국가가 분열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가 한 일은 행정절차의 작은 일이다. 공무원은 충성서약을 하는데, 서약을 어기는 것은 해악이고 내가 한일은 시대에 연관된 문제였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이 없다. 나는 살면서 언제 어디서나 법을 지킨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규칙을 어겼거나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 때만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아이히만은 결국 자신이 고안해낸 가스실 열차, 그 안에 수백 만명을 몰아넣어 질식 사망케 한 혐의로 사형을 처벌받았다. 그의 행위는 평범한 사람이 저지른, 그야말로 인간이기를 거부한 악행이었다.

미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이와는 분명 경우가 다르지만 수많은 이민자들의 생존을 쥐고 흔드는 점에서는 일정부분 유사한 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트럼프는 미국의 세계적인 발전과 이민자들의 입장은 고려않고 오로지 백인위주의 자국만을 위한 정책을 펴겠다고 취임 초반부터 칼바람을 일으키며 나라를 혼돈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의 막가파식 행보를 보다 못해 그의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한 유대인에 대한 증오감이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최근 뉴욕, 시카고 등 대도시 지하철 등에서 나치문양이 발견되고 유대인 시나고그의 유리창이 파손되는 등 곳곳에서 반 유대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또 전날에는 텍사스주 휴스턴의 라이스대학교 내에서 이 대학 유대인 설립자의 동상이 파괴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것이 자칫 미국내에 인종혐오, 반유대주의로 확산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트럼프는 대체 언제까지 막가파식 행보를 보일 것인가. 그는 모든 행정을 강경으로 몰아부쳐 법적으로 되면 되고 안 되면 말고 식으로, 덮어놓고 아무거나 밀어붙이고 있지만 그게 과연 언제까지 통용될까. 그의 행보를 바라보는 심정이 그저 착잡하고 답답할 뿐이다. 그의 막무가내식 반이민정책은 미국의 가치나 미국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볼 때 엄연히 배치되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미국의 진정한 가치나 미국에 이민 와 살고 있는 수많은 소수민족의 처지나 미국을 찾는 전세계 이민자들의 바람을 알기나 하는 것일까.

급기야 제임스 로버트 워싱턴주 서부연방지방법원 판사가 강공드라이브로 밀어붙이는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이 미국법에 저촉된다며 급제동을 걸고 나서 그 결과가 주목된다.

유대인 600만 명 학살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한 아이히만의 재판은 국제적 범죄행위에 관한 것이지만 트럼프의 재판은 인간의 목숨과는 관계가 없더라도 그에 버금할 만큼 미국의 수많은 이민자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반 이민법이라는 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일깨운 결정이다. 국내외 많은 이민자들의 발을 묶음으로써 미국의 발전을 막을 수 있기에 미국의 상당수 정치인들과 수많은 이민자들로부터 비난받는 정책이라는 이유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아이히만 재판에 참석했던 미국의 유명한 여성언론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향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날렸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소수민족이나 다른 나라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백인만을 위한 자국위주의 정책으로 강공 드라이브를 펼치는 트럼프에게도 십분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아렌트의 이 말을 과연 트럼프가 알고나 있는 걸까.
juyoung@koreatimes.com

<여주영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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