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죽음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2016-10-22 (토)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크게 작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서러운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왜 슬퍼하는가?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훗날 소중하게 여겨지리라.” 러시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전문이다.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푸쉬킨(1799-1837)은 지난 100년간 러시아의 시 분야에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시인이 없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도스토예브스키는 푸시퀸의 작품을 가리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성을 지녔다고 평할 정도로 푸쉬킨은 삶을 관조하라고 강조한다.

10월14일 뉴욕에서 목회하던 젊은 목사 한 분이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종교취재를 하면서 여러 번 만났던 목사다. 수백여 명의 목사들과 종교인들을 만나보는 가운데 이 분은 청렴하고 순수하게 목회하는 유망한 목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만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던 중 사랑하는 가족을 남기고 떠났다.


한창 일할 나이에 세상을 등진 젊은 목사의 떠남 소식을 듣고 여러 날 동안 삶에 대한 질문이 일어났다. 그러며 떠오른 것이 푸쉬킨의 시였다. 푸쉬킨은 삶, 즉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하는데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 이렇게 젊은 목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31세의 권혁주(1985-2016)씨가 지난 12일 자정, 부산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2일 오후 부산 연주회를 앞둔 권씨는 전날 저녁 친구 집에서 지인들과 술을 마신 후 택시를 타고 해운대 호텔로 가던 중이었다. 택시기사는 권씨가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는데 호텔에 도착해보니 숨을 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3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한 권씨는 9살,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다. 1995년(10살), 차이코프스키 청소년국제콩쿠르입상. 2004년(19살), 파가니니 국제콩쿠르우승, 덴마크 칼 닐센 국제콩쿠르 한국인 첫 우승. 이후 퀸 엘리자베스콩쿠르 입상 등을 했고 한국에선 가장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사망원인은 급성심정지(急性心靜止).

서울대학교 등에 출강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권혁주씨. 바이올리니스트 정명화씨는 “혁주를 이렇게 떠나보내니 황망함과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그는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음악을 지독히도 사랑한 청년이었다”며 “혁주야 마음이 몹시 아프구나, 편히 쉬어라, 너를 영원히 잊지 않으마”라고 애통해 한다. 슬프지 않은가.

2012년 3월1일 늦은 저녁. 한인사회와 이웃사회에 웃음과 희망을 안겨주던 뉴욕의 김철원변호사가 집으로 가던 중 심장발작을 일으켜 가로수를 들이받은 채 사망했다. 45세. 그는 미주한인청소년재단, y-Kan이사장, 뉴욕밀알선교단이사, 채널13한인후원회장, 경로센터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아낌없이 이웃을 후원하던 변호사였다.

그의 떠남은 가족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했다. 자신과 이웃을 위해 신나게, 열심히 봉사할 나이에 홀연히 세상을 하직한 그. 푸쉬켄의 시처럼 그는 가고 없지만 아직도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엔 소중하게 그의 모습과 선행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런데 왜, 앞길이 창창한 필요한 사람들이 이렇게 일찍 세상을 뜰까.

푸쉬킨은 말한다. 왜, 슬퍼하는가? 라고. 그러며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니 마음은 미래에 두고 살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훗날 소중하게 여겨질 것이라고. 그래, 그들은 갔지만 우리 또한 언젠가는 그들이 간 곳으로 따라 가야 할 것을. 그것이 순리요, 자연법칙인 것을 어쩌랴.

서러운 날을 참고 견디는 자에게 올 복 있는 날이 있다. 그건 기쁘고 즐거운 날이다. 경건한 한 중년 목사의 죽음. 젊디젊은 세계적 유망주, 바이올리니스트의 죽음. 이웃을 끔찍이 사랑했던 한 변호사의 죽음. 죽음, 죽음, 죽음! 죽음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보편성의 관조의 마음을 우린 가져야 하질 않을까. 모든 것을 품에 안는 우주처럼.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