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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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아시아 사도바울의 선교 현장을 가다 (8)] 사랑의 복음만 남은 고린도

2016-07-27 (수) 권혁인 목사 (열린교회 담임목사, Pacific School of Religion 학생생활상담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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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는 고대부터 교역의 중심지. 유럽 최초의 교회 세워져

▶ 바울의 ‘사랑이야 말로 가장 큰 무기’ 가르침 큰 울림으로 다가와

[소 아시아 사도바울의 선교 현장을 가다 (8)] 사랑의 복음만 남은 고린도

고린도 유적지에서 성지 순례단 단체사진,뒤에 아크로 고린도 언덕이 보인다

터키를 여행하며 테러와 이슬람 종교에 대한 낯설음으로 인해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목가적이고 여유로 가득찬 그리스 땅에 이르면서 조금씩 풀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 경기침체로 세계적 관광도시인 아테네에서 조차 화려함이나 풍요함을 느끼지 못해 아쉬웠는데, 그리스 내륙을 달리며 버스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과 그 속에 어우러진 가축들 및 사람들 모습 속에서 일종의 생명의 조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서북쪽으로 1시간 30분가니 서쪽의 이오이나해와 에게해를 연결한 고린도운하에 도착했다.


고린도는 고대 시대부터 북쪽의 그리스 본토와 남쪽의 펠로폰테소스 반도를 잇고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경제적인 이득을 누리던 곳이다. 특히 동서 양면 에게해와 이오니아해에 두 개의 커다란 항구를 가지고 있어서 고린도는 교역의 중심지로 막대한 부를 누린 곳이다.

그 중 동편에 위치한 갠그리아 항구는 바울이 고린도 사역을 끝내고 에베소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머리를 깎고 서원한 곳이다. 고린도운하는 상업적 교역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운하는 실제로 19세기 말에 완공되었지만 이미 고대시대부터 건설시도가 이뤄졌다고 한다. 특히 네로 황제는 6,000명의 유대인을 고린도로 강제 이주시켜 운하작업을 시작했는데, 이들이 나중에 바울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유럽 최초의 교회가 고린도에 세워지게 되었다고 하니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고린도운하를 떠나 우리는 AD50~52년 바울이 교회를 세운 것으로 알려진 고린도 유적지로 향했다. 유적지가 있는 구고린도의 고대도시에 다가서면 해발 575M의 아크로 고린도 언덕이 보이며 그 아래에 아폴로 신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당시 이 신전에서의 매음 행위와 성적 문란은 ‘고린도인과 같이 군다’는 말의 근원이 되었다고 한다.

신전들을 지나 옛 도로를 따라 더 내려가면 아고라(시장)의 터와 건물흔적을 볼 수 있다. 19세기의 대대적 발굴로 이곳에 극장, 상점, 공중목욕탕 등 유적들이 공개되었는데, 지금 보기에도 당시 생활수준이 풍요롭고 화려했음을 짐작케 한다. 그 중 시지프스의 신화로 알려진 페이레네 샘터도 아직 남아 있다.

신화에 따르면 물이 귀한 이 지역에 샘터를 만든 영웅 시지프스가 제우스의 미움을 사 언덕위로 바위를 끊임없이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끊임없이 언덕을 오르려다 결국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욕망의 분출과 타락의 길로 향했던 고린도의 실상을 보는 것 같았고 더불어 성공과 소유를 목적으로 끊임없이 오르려고만 하는 현대사회의 이면과 ‘죄와 벌’에 노출된 우리 시대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

[소 아시아 사도바울의 선교 현장을 가다 (8)] 사랑의 복음만 남은 고린도

고린도의 샘터와 공중목욕탕. 풍요 화려한 생활상을 볼수 있다



늘 문제는 외부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법이다. 실제로 바울의 전도사역을 위험에 빠뜨리게 한 것은, 외부의 퇴폐적 활동이나 이교적 행위가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린도 지역의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다.

바울의 전도가 모세의 율법에 어긋난다며 총독 갈리오에게 고발했던 사건이 사도행전 18장에 있다. 당시 갈리오는 바울에 대한 고발이 형법이 아닌 유대의 율법에 관련된 사항이므로 법정에 세울 이유가 없다며 유대 지도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 총독 갈리오가 바울을 고발하기 위해 몰려온 유대인들에게 위에 올라가 연설한 베마(Bema)가 아직도 거기에 남아 있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기독교인들은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베마위에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베마에서 야외극장으로 향하는 길에 돌로 포장된 도로가 하나 있는데, 그 끄트머리 바닥에 라틴어로 “에라스도(Erastus)가 사비를 들여 이 길을 돌로 포장했다”라는 돌조각이 있다. 사도행전 19장 22절은 당시 고위 관리였던 에라스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언급한다. 비록 탐욕과 타락이 만연하고 내부적으로는 시기와 질투로 눈이 먼 현실이었어도 하나님의 역사는 바울의 사역을 통해 열매 맺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고린도 유적지의 특징 중 하나는 고고학 박물관을 통해 역사적 유물들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해 주고 있는 점이다. 박물관의 외부 회랑에 전시되고 있는 부조물들은 전쟁을 주제로 AD 2세기에 만들어진 조각품들이 대부분이고, 전시실에는 로마 황제와 알렉산더 대왕의 조각상이 주로 전시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박물관 안마당에 전시되어 있는 머리와 팔이 없는 동상들인데, 당시 부유층들은 이 동상들을 자신들 집 앞에 세워놓아 일종의 문패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조각가들이 주문에 앞서 미리 여러 개의 몸통을 만들어 놓았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주문자에 맞게 머리와 손만을 만들어 팔다보니 이렇게 기이한 형태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또 박물관 안쪽의 조그마한 전시실에는 치료의 신이라 알려진 "아스끌리삐오스 신전"터의 출토물들이 있다. 그곳에는 제사에 사용하기 위해 자신의 아픈 곳을 모형으로 떠서 봉헌한 신체의 여러 부분들을 있다.

특히 성기의 모형이 많은 것으로 보아 성병이 만연할 만큼 성적 타락이 심각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고대 로마와 헬라문화를 알 수 있는 유물만이 아니라 전시물 중에는 유대의 회당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들도 남아있었다. "히브리인의 회당"이라는 헬라어 글자가 새겨진 회당 출입구 문패와 유대의 촛대가 새겨진 돌기둥이 이방의 유적물들 틈사이에 전시되어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큰 지진으로 인해 고대의 도시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구 고린도의 유적지와 박물관의 전시물만 덩그러니 남아있어 바울의 발자취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교회의 모습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고대 시가가 무너진 이후에 1858년 그곳에서 북동쪽으로 약 5km 떨어진 지점에 신 고린도시가 건설되어, 그 유지를 담고 있을 뿐이었다. 새로 건설된 신도시의 중앙에는 바울교회가 서 있다.

교회 건물의 양 기둥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고, 입구 우측에는 흔히 ‘사랑의 장’이라 일컫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벽면 한 귀퉁이에는 역대 교역자의 명단도 적어 전시하고 있는데, 그 첫 이름이 바로 바울이다.

그리고 그 명단은 89번 이후로 빈 공란으로 남아 지금까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온갖 험난한 여정과 장애물 속에서도 복음을 향한 의지를 저버리지 않고, 장막을 지어가며 교회를 일으켜 세웠던 바울의 여정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이 시대 바울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에 열정을 다하고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사랑이야말로 가장 큰 무기이자 도구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고린도의 무너진 신전과 대비하여 마음 속 깊이 울림이 되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권혁인 목사 (열린교회 담임목사, Pacific School of Religion 학생생활상담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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