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깨어있는 여자, 잠자는 남자

2016-03-12 (토) 김미연(미술사 블로거/ 와이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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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 ESL교사를 할 때였다. 교감은 어떤 학생의 주거지가 불분명하니 부모를 불러 컨퍼런스를 하라고 했다. 여러 번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 그 학생에게 부모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 그는 부모가 한국에 가고 없다면서 삼촌(?)을 데려왔다.

공립학교는 세금을 내는 타운 주민의 자녀에게는 무료다. 좋은 학군으로 알려진 그 동네는 하숙을 하는 조기 유학생들이 있었고, 가끔 적발이 되기도 했다. 이런 경우 동거인이 보호자로 등록하고, 등록금을 내면 계속 다닐 수도 있었다. 삼촌이라는 분은 내 설명을 다 듣고도 덤덤했다. 그러다 난데없이 "선생님은 밥하다가 나와서 참 고생이 많으네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당황하여 더 이상 할 말을 잊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밥하다가' 라는 말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결국 네 본연의 일은 밥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미였을 것이다. 20세기 초반까지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교육에서 배제된 채 자신의 가능성을 모르고 살다가 죽었다. 하지만 간혹 천재성을 보인 여성들도 있었다.
19세기 중반, 스물 아홉 살의 에밀리 브론테(1818-1848)는 ‘폭풍의 언덕’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소설은 남성의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진짜 이름은 일 년이 지난 사후에야 알려졌다. 브론테는 자신의 이름을 쓸 수조차 없었지만, 80여년 후 펄 벅(1892-1973)은 소설’대지’에서 시대가 불편해하는 이야기를 들추어 냈다. 근대 중국의 혼란기에 집안을 일군 여자 '오란'의 이야기다.


당시는 여성의 자유를 속박했던 전족이 여자의 품위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부인의 덕으로 지주가 된 남편은 점차 소같이 일했던 아내의 '큰 발'이 보기 싫어진다. 첩실을 들여 오란의 마음을 짓누르니, 그녀는 결국 일찍 병들어 죽는다. 남편의 성적 대상과 종과 그림자로 살다간 오란. 남편은 장수를 누리다가 죽기 전에야 참회를 하고, 오란이 저 세상에서 자신을 따뜻이 맞아 주리라는 희망까지 가진다.

미술계에서도 현대 여성 작가들이 부쩍 두각을 드러낸다. 페미니스트 화가 하나 윌키(1940-1993)는 자신의 얼굴에 껌딱지를 닥지닥지 붙이고 사진을 찍었다. 씹다 버린 껌처럼 남성에게 소비되고 버려졌던 수많은 '오란'을 표현하려 했을까.

사진작가 신디 셔만(1954-)은 자신이 할리우드 영화 속 여주인공들과 똑같이 분장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녀의 사진 시리즈 중에는 타이트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은 가정주부가 청소기를 돌리는 장면이 있다. 이 사진처럼 '오란'은 일에 찌들어도 인형 같은 모습을 보여 주어야 했던가. 셔만은 남자의 염치없는 응시와 여성들의 애매한 정체성에 질문을 던진 것이다.

객체가 아닌 주체로 살고 싶음은 남녀를 막론한다. 생명의 원천인 밥! 거기에 보태어 남편을 돌보고 애들을 키우며 직장 생활까지 감당하는 여성들이 아닌가. 이처럼 여자들은 객체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살고 있다. 그토록 여러모로 엽렵하게 살았기에 여성들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생기에 넘친다.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그 '밥'이라는 말에 걸려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김미연(미술사 블로거/ 와이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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