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치약

2016-02-06 (토) 정유경 (강사/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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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에 새로 꺼내 놓은 대형 Crest 치약의 뱃가죽이 등가죽에 찰싹 들러붙어 거울 옆에 납작 엎드려 있다. 비록 아들이 양치질을 하루에 한번 밖에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치약을 쥐눈이 콩만큼 짜서 쓰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치약의 소모가 그리 많지 않아 아들과 나, 둘이서 족히 6개월 이상은 쓰던 치약이었다. 그런데 고작 한달 만에. 한달 전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한국에서 온 시조카의 등장이 가져온 변화이다.

비록 치약을 나눠 쓰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하더라도 3개월 정도는 가야 하는 것 아닌가? 도대체 치약을 얼마나 쓰길래? 혹시 치약으로 목욕이라도 하는 건가? 별생각이 다 들기 시작한다. 헤픈 것이 어디 치약뿐이랴? 비누며 샴푸도 예외는 아니다. 코스트코에서 대량으로 사면 얼마 안 되는 것들이지만, 조각그림 맞추기처럼 빼곡한 숫자들로 가계부를 채워가는 살림에서 치약쯤이야 라고 여유로울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많이 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경이롭게 여겨지다가도 머릿속에선 찰칵찰칵 주유소의 미터기처럼 달러 단위가 올라가고, 그러다 갑자기 환경운동가의 기운이 뻗쳐 그 많이 소모되는 치약이며 샴푸가 화장실 배관을 타고 하수구로 흘러내려 강이며 바다를 오염 시킬 것을 생각하니 울화마저 치민다.

그런데 이게 어찌 시 조카만의 문제겠는가? 일상에 대한 불편함과 예민함이 시조카에게 투영된 것일 뿐이지 나도 이런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나라고 치약을 쥐눈이 콩만큼 쓰면 뭘 하나,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만만하게 북북 찢어 쓰는 Paper towel, 걸레 빨기가 싫어서 당연하다는 듯 척척 쓰는 일회용 wipe paper, 한 끼 해먹고는 툭툭 거침없이 털어내는 음식들로 쓰레기통이 가득한데. 앞으로 나의 아들이 또 그 아들의 아이들이 대대로 살아가야 하는 이 지구, 우리세대가 잠시 빌려 쓰고 있는 이 지구라고 습관적으로 되 뇌이면서도 물질주의적 욕망과 무분별한 소비현실은 매주 2번씩 집 앞 마다 두둑하게 쌓여있는 쓰레기더미로 남아오지 않았던가?


사냥꾼의 총소리에 놀라 풀섶에 고개를 처박은 꿩처럼, 내 눈앞에서만 안보이면 그뿐이고 그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는 관심도 없지 않았던가? 어쩔 때는 우리 후손들이 히말라야 산 만큼 높이 쌓인 쓰레기 더미 위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밀려오는 한숨과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갱년기의 깜빡깜빡 증상덕택인지, 부끄러움의 자기변명인지, 그 고민도 청소차의 바퀴소리와 함께 고스란히 사라진다. 샤~악!
언젠가 한 방울의 물도 소중해서 나뭇잎에 내린 이슬을 조심이 입에 흘려 내리는 부쉬맨들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보면서 수도꼭지만 돌리면 뜨거운 물, 차가운 물이 철철 흘러나오는 축복을 실감하며 물을 소중히 여겨야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다큐멘터리와 함께 그 생각도 끝이 나고, 그 축복이 나에게 당연한 듯 어제처럼 설거지를 하고, 샤워를 하고, 화장실의 물을 내리고 돌아선다. 지구 온난화에 대해 과학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줄줄이 말 할 수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그 원인이 나이고 그 원인을 줄이기 위해서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는 것도 나인데.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는데 70년이 걸렸다.” 머리로는 다 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지를. 그런데 과연 내가 안다고 잘난 척 하는 이 지식들이 머리에서 몸으로 내려가는데 얼마나 걸릴까?
오늘은 새삼 내가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정유경 (강사/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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