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역사적’ 사표(師表)에 대한 단상

2016-01-29 (금) 김은주(뉴욕시 공립학교 과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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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師)는 스승을 의미하는 한자다. 당(唐)의 대문장가 한유(韓愈)는 스승을 ‘진리를 전하고, 학업을 가르치고, 의혹을 푸는(傳道授業解惑)’ 존재라고 정의했다. 스승은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고, 절망 속에서 희망의 길을 보여주는, 그래서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다’는 고귀한 존재다. 교사(敎師)는 역시 ‘백년을 내다보려면 사람을 심는다(百年樹人)’는 국가 백년대계의 중추이다.

그리고 그 누가 우리에게 역사적 스승일까? 사표를 그리고 그 표상을 역사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데 어떤 의미를 부여해 보고 싶다. 관점에 따라 어느 특정인, 혹은 조직도 이 ‘역사적’ 사표가 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하나의 사건, 사조, 시대정신, 혹은 제3의 물결도 역사적 사표, 혹은 이정표로서 정의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나는 뉴욕 한인이민사 교육분야에 큰 족적을 남기신 허병렬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선생님의 구순(九旬) 잔치에 저도 꼭 참석해서 꽃다발을 바치고 싶었는데…” 하면서 목멘 소리로 불평을 했다. 한국식 배타적 장벽 때문에 나는 허병렬 선생님의 구순잔치에 참석을 못하고, 다음 날에야 선생님을 찾아뵙고 점심을 나누면서 깨소금처럼 단맛과 향기가 나는 대화를 즐길 수 있었다. 허병렬 선생님은 연만하신데도 불구하고 항상 활기차고, 다정하고 환하게 웃으시면서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신다. 허병렬 선생님이야 말로 우리의 역사적 사표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특정 사건, 혹은 시대정신의 요구에 부응하는 운동, 물결 등을 교훈적이라는 관점에서 의미를 부여하여 역사적 사표로. 혹은 역사적 반면교사로 교육시킬 의무가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싶다.

우리 조국이 거쳐 온 격동의 근대사에서 일제의 성노예, 자유당의 부정선거, 그에 따른 4.19혁명, 박정희의 도강(渡江) 및 국권유린, 치욕적 한일협정, 비극적 인혁당 사건, 박정희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과 5.18 광주민주항쟁, 미국의 MoveOn, Change.com 운동, Bernie Sanders와 한국의 이재명 시장의 돌풍 등은 “역사적” 사표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뜻 깊은 교훈을 제공해 준다.

역사는 끊임없이 진화한다. 그 진화의 과정은 때때로 세찬 폭풍을 동반하고, 일파만파 파도를 일으키면서 큰 변화를 가져온다. 절망의 어두움 속에서 희망의 서광이 우리 앞에 나타날 때의 감회란 극적인 환희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역사의 비관적 대세 앞에서 절망과 좌절에 빠진다면, 그것은 바로 역사의 종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죽음의 계곡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새로운 돌파구가 열린다는 사실을 바로 이 역사적 사표에서 찾았고, 그래서 영국의 세계적 역사학자 E. H. Carr는 “역사는 전진한다”고 말했다.

나는 최근 서울대 최종길 교수 ‘의문사’를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은 물론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 시절 자행된 수많은 의문사 중의 하나이며 사악한 정권에 저항했던 고귀한 지성들에 대한 탄압의 일환에서 발생한 비극이다. 이 사실을 접했을 때 나는 피를 토하고 싶은 고통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은주(뉴욕시 공립학교 과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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