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데이

2016-01-15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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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8일은 연방국경일로 마틴 루터 킹 주니어(1929년 1월 15일~1968년 4월4일)데이다. 마틴 루터 킹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날은 원래 그의 생일인 1월 15일에 맞추어져 있지만 요일 기준으로 기념일을 지키는 미국의 관행에 따라 1월 15일에서 가장 근접한 1월 셋째주 월요일로 지정되었다.

평화와 비폭력운동을 주창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기리는 기념식과 각종 행사가 미 전국에서 열리지만 한인사회에서는 새해들어 처음 주어진 연휴를 참으로 조용하게, 푹 쉬면서 보낼 것으로 보인다.

한인사회는 바로 며칠 전인 13일 113주년 미주한인의 날 기념식과 행사를 치렀다. 1903년 1월 13일 102명의 한인 이민자가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 제2부두에 도착한 사탕수수 이민이 제1의 이민, 1910년대에 하와이로 온 사진신부들이 제2의 이민, 그리고 1965년 개정이민법으로 시민권자의 가족 초청이민이 허용되며 70년대부터 대거 몰려온 한인이민자들이 제3의 이민이다.


이때 들어온 한인 이민자들 중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이들도 많. 또 오늘날 한인사회가 이만큼 성장하기까지 킹 목사를 비롯한 흑인인권운동가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955년 앨라배마 몽고메리 버스 안에서 흑인여성 로자 파크스가 백인남성을 위해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다. 침례교 목사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로자 팍스 사건을 주도하며 민권운동을 본격 시작했다. 1964년 워싱턴 대행진에 20만명이상이 모이며 인종차별 철폐를 호소했고 셀마, 몽고메리, 앨라바마까지 온갖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행진을 마쳤고 드디어 1965년 8월 6일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민권법을 승인했다.

1870년 남북전쟁으로 흑인들이 노예신분에서 해방되고 흑인남성의 투표권이 인정되었다고 하나 남부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1965년에야 법적으로 완전한 평등을 획득한 것이다.

킹 목사는 워싱턴 대행진에서 말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하게 받아들이고 우리의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으로 평가받는 날이 오는 꿈입니다. “ 그에게는 백인,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이란 개념이 없다. 그냥 모두 다같은 사람이다.

“백인의 차별보다 더 무서운 것은 흑인 스스로가 백인보다 못하다는 열등감을 갖는 일이다”이 흑인이란 단어 대신 무슬림, 히스패닉, 유색인종, 그리고 한인을 가져다 놓아 보라. 킹 목사 역시 인간인지라 절망하고 나약한 면을 보여주고 다른 여성과의 스캔들에 연루되는 등 많은 결점을 보여주었지만 끝까지 외부의 압력을 싸워서 이겨낸 결과, 오늘날 이민자인 우리가 혜택을 받고 있다.

시민권을 받고 미국 시민이 되면 유권자 등록을 하여 대통령을 비롯 모든 선출직 공무원을 뽑을 수 있다. 물론 민권법 통과 50년이 넘었지만 흑인들의 삶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인종간 편견이나 마찰이 자리 잡고 있고 경찰과 용의자 흑인간의 인종차별 사건사고가 수시로 터지고 있다.

과거나 지금이나 공권력의 만행은 있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다녔던 대학 캠퍼스를 떠올려보라. 경찰이 있었고 언론의 숨통을 막는 군사정권이 있었다.

또한 공권력에 맞서 싸우는 용기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이라고 폭력에 대한 공포가 없었겠는가.

하지만 이를 이겨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앞만 바라보고 살지 말고 다른 모든 이를 위한 더 넓은 삶을 살 때 그의 진실된 삶은 시작된다’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말이 당신을 부끄럽게 하는가. 그렇다면 부당하고 억울한 처지의 여성, 거리를 방황하는 청소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장애자와 노인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옳은 일은 바로 지금이 적기라 하지 않는가.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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