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

2015-12-26 (토) 윤해영(병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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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소련 시절 노벨 문학상 수상자 솔제니친의 글에서 읽은 내용이다.
포로 수용소 안, 누군가가 물었다. “우리는 무엇에 의해 사는가?” “공기와 물, 그리고 약간의 음식에 의해서지” 정답이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아쉬웠다. 서로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식량 배급과 월급에 의해서지” 모두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웅성거렸다.
마르고 키가 큰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자기의 능력에 의해서야” 그 말을 하며 사내는 주위를 쓰윽 둘러보았는데 모두 자신이 없는 듯 발끝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태어난 고향, 태어난 고향이야” 빛 바랜 누런 모자를 쓴 혈색 나쁜 사내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모두들 두고 온 고향 생각에 잠겨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그때 한 사람이 외쳤다. “무슨 말이야. 잘 알아둬. 사람은 사상성과 사회적 이해에 의해 살고 있단 말이야” 그럴듯한 모자를 쓴 그럴듯한 풍채의 사내가 큰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아무도 대꾸할 엄두를 못 냈을 뿐만 아니라 딴 사람보다 좀 더 동조의 뜻을 크게 나타내기 위하여 서로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큰 소리로 합창하듯 떠들어댔다.


“그래요, 우리의 사상성이… 우리의 사상성이…” 그때 소년티를 갓 벗어난 듯한 얼굴로 처음부터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한 청년이 수줍은 듯 말했다. “우리는… 사랑에 의해 살아요” 그 사랑이라는 말은 감히 입에는 올릴 수 없는, 녹아버리는 솜사탕이나 곧 사라져버릴 무지개 같은 것이어서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는 거의 두렵기조차 한 단어였다.

그들의 가슴속에서 상실해버린 그 단어 ‘사랑’,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한 겨울의 들판 같은 사내들의 가슴속에 따뜻한 봄기운 같은 것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볼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깨진 유리창 밖 앙상한 나뭇가지에 연분홍 봄꽃이 피기 시작한 것 같았다..

모두들 눈부신 듯 그곳을 바라보았다. “잃었던 사랑을 찾기 위하여…”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사랑에 의해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시고 흡족하셨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존재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랑, 찬 겨울을 지나고 움터 오르는 새싹같이 삭막한 사나이들 가슴에 번지는 두 단어. 사랑이란 무엇일까? 영원히 풀 수 없는 단어는 아닌지...

<윤해영(병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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