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거지 예찬”

2015-12-22 (화) 김창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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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지들이다. 그것은 참말이다.“ 16세기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아이슬레벤에서 죽을 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이 한 줄의 담백한 문장 안에 하나님을 향한 그의 뜨거운 사랑과 믿음이 농축되어 있다.

지난 15일은 기독교 윤리학을 종강하는 날이다. 시험을 치르는 대신 학생들을 데리고 무숙자를 찾아갔다. 한 학기동안 가르치고 배운 윤리 지식을 실천에 옮겨보자는 취지이다. 내 학생들은 선하고 착하다. 교수가 부탁한 대로 선물을 준비하고 신나게 따라 나선다.

하늘은 먹물처럼 흐렸다. 오후 4시가 지났을 뿐인데 사물의 지척이 벌써 희미하다. 하루의 빛은 어두움에게 시간을 양보하고, 어두움은 작은 틈을 열어 빛의 선물을 서서히 수용하고 있었다. 불 밝힌 상가마다 사람들은 흥청거렸다.


무숙자들의 안식처인 엘머스트 82가 공원 안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서로 엉켜 농구에 열중하는 즐거운 아이들, 벤치에 앉아 밀담을 속삭이는 젊은 남녀들, 허툰 마술을 구경하면서 환호하는 동네 사람들, 술에 취해 혼자 중얼 거리며 비뚤어진 세상을 비판하는 길거리 철학자들이 함께 어울려 있었다.

우리가 찾는 무숙자들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여리고성을 돌듯 공원 안팎을 맴돌았다. 세 번째 돌 무렵이다. 무숙자들이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났다. 열 명이 넘었다. 준비해 간 털모자, 장갑, 목도리를 보여주었더니 발을 구르며 야단들이다.

선물을 다 나누어 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떠나려 하자, 누가 소리를 지른다. “이런 식으로 일 년에 한 번만 오려거든 차라리 오지 마세요. 우리에겐 매일의 친구가 필요하답니다. 매일의 친구가-”
그때 한 줄기 물바람이 내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거의 숨 쉴 수 없었다. 가슴이 울컥거렸다. 내 손이 그들의 어깨에 닿을 때 또 한 차례 물바람이 불었다.

기죽지 않고 할 말 다하는 무숙자들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무숙자들은 생각 없이 그냥 받지만 않았다. 좋으면 좋다고 했고, 싫으면 싫다고 했다. 필요 없는 것은 받지 않았다.
구걸하는 자의 미덕은 수용성에 있다. 두 손을 활짝 펴서 잘 받을 때, 주는 자와 받는 자는 모두 아름답다.

실패자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홀로 양을 치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하나님의 임재를 수용함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리더가 되었다. 프란시스는 폐허가 된 다미안 성전에서 홀로 기도하다가 예수의 부르심을 수용하고 성자가 되었다. 12월은 ‘수용의 달’이다. 하나님의 선물 예수를 수용하고, 이웃이 베푸는 사랑과 용서를 수용하고, 갈라진 삶의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은총의 빛을 수용하는 달이다. 리더라면 잊지 말라. 거지같은 수용만이 당신의 영혼을 흔들 것이다.

<김창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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