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페루에의 추억

2015-12-19 (토) 정정숙(전직공립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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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가장 어려운 과목이 지리였다. 한국지도까지는 외웠는데 여러 나라 지도는 어디가 어딘지 구별이 되지 않아 지리는 낙제점수를 받을 때도 있었다. 대학에 가서야 내가 지독한 길치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여행을 크게 즐기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혼자라도 여행을 떠나기 좋아하는 남편을 따라 페루를 다녀온 지는 만 5년도 더 되었는데 다시 가보고 싶다. 그것은 마추피추도 불가사의였지만 그보다는 가난하면서도 미소를 띄고 순박해 보이던 페루 사람들이 보고싶어서이다.

페루에 가기 위해 우선 쿠스코에서, 높이 자리한 여관에서 숨이 잘 안 쉬어져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엿새를 지나고 마추피추를 향해 가던 날은 현금이 거의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ATM 카드 기계까지 고장이 나서 돈을 인출할 수가 없었다. 50달러짜리를 내고 음식을 사먹고 거스름을 받으려니 아무 식당에서도 받지 못하겠단다.


이유는 돈이 아주 조금 찢어진 데(가운데 가장자리 흰부분 2 밀리미터쯤)가 있어서란다. 미국 지폐는 찢어질 수가 없다며 우리 돈이 진짜 50달러짜리가 아니고 가짜라니 어이가 없었다. 남은 돈을 보니 7달러, 여관은 예약이 되어 있었지만 7달러를 가지고 둘이 하루를 더 견디어야한다니 기가 막혔다. 말도 잘 안 통하는 곳에 와서.

그 날은 마침 예수성심 대축일, 일년 중 페루에서 가장 성대한 축일이라고 해서 길가에는 악기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며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운동장에 이르러서는 구경꾼들이 많아지고 춤꾼은 다소 줄어들었다. 신나는 곡이 나왔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간다고, 본시 흥도 많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돈 걱정도 잠시, 신명을 주체하지 못해 합류했다. 내가 춤을 추자 사람들이 환호하며 좋아했다.

자기네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생긴 여자가 자기네들과 춤을 추니 사뭇 신기하기만 했나보다. 잠시 쉴 동안 어떤 이가 맥주 한 캔을 사주었다. 더 신나게 추라고.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페루가 얼마나 가난한 나라인데 이곳에서 대접을 받다니… 내가 돈이 있었다면 몇 명에게 대접을 했으련만… 그 순간 아무것도 살 수 없었던 남편 생각이 나서 맥주 캔을 따지도 않고 여관으로 향하니 맥주를 사준 이가 기겁을 한다. 술을 마시고 춤을 더 출 일이지 어디를 가느냐고. 영어를 아는 이를 통해 겨우 곧 다시 합류하마 하는 약속을 하고 여관엘 가서 남편에게 맥주를 건네주었다. 약속대로 돌아가 조금 더 춤을 추다보니 밤 12시. 다음날 새벽부터 서둘러야 페루에 온 본 목적, 곧 마추피추에 올라갈 수 있겠기에 더 놀고 싶지만 걱정할 남편을 생각해 급하게 달려가기시작했는데 (마치 동화 속 주인공의 요술이 밤 12시에 풀려 허겁지겁하는 식으로) 아뿔싸 달리던 길 중간에 계단이 하나 있는 것을 몰라 헛발질을 하고 심하게 나동그라졌다.

그 다음날 심히 절뚝거리는 나를 보자 남편은 어찌 마추피추를 올라가느냐, 뉴욕으로 돌아가자 했지만 지팡이와 남편에게 매달려 겨우 세계 제일의 불가사의라는 마추피추를 오르긴 했다.

그 때 다친 그 다리는 5년이 지난 지금도 날씨나 내 몸의 컨디션에 따라 나를 괴롭히지만 '춤을 추지말 것을…'이란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낯모르는, 가난하지만 마음 따스한 페루 사람으로부터 선사받은 맥주 한 병이 두고두고 내게 훈훈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이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닐까?

<정정숙(전직공립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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