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쌍문동 18세와 뉴욕 18세

2015-12-18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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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에 이어 요즘 ‘응답하라 1988’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응답하라 1988’은 쌍문동 봉황당 골목에 모여 사는 덕선이네 가족, 정환이네 가족, 선우네 가족, 택이네 가족, 동룡이네 다섯 가족의 평범한 소시민들 이야기다.

1988년 당시 한국 서울에 살고 있었다. TV만 틀면 88올림픽 노래가 나왔고 올림픽 기간에는 새벽부터 밤까지 경기 중계를 했다. 맛있는 반찬을 하면 아래윗집이 나눠먹고 빈 그릇으로 돌려보내지 않던 인심이었다. 집집마다 대문 옆 담벼락에 커다란 시멘트 쓰레기통이 볼품없이 부착되어 있고 네모난 투입구로 연탄재를 비롯 온갖 쓰레기가 마구잡이로 버려졌었다. 부엌의 풍로보다는 개스렌지가 한창 보급되면서 결혼하는 친구에게 고교 동창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개스렌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등가구, 흰 레이스 커튼, 초록 천 유리판 깔린 식탁, 담장 위에 무수히 박힌 유리조각들, 대문 위에 만든 사각형 공간에 키우던 화분들(왜 사람이 드나드는 머리위에서 화분을 키웠을까?), 삼익쌀통 등 집안팎 모습이 낯설지 않다.
덕선, 정환, 선우, 택, 동룡 다섯 친구의 사랑과 우정은 좀 부럽다. 그렇게 사심 없이 좋아하고 위해주는 시기가 그 나이 아니면 찾기 힘들다.


한편 쌍문동 아주머니들은 별로 살기에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정환네 라여사의 부는 올림픽 복권 당첨 덕분이고 밤에 목욕탕 청소하는 선우엄마가 고생을 하지(그래도 고향오빠라는 기댈 언덕이 있다), 덕선 엄마는 남의 집 반지하에 살아도 남편은 든든한 직장이 있다.

18세 친구들 역시 누구나 지나가는 청춘의 통과의식을 무난히 지날 뿐이다. 바둑 천재이고 전교 일등인 이들, 공부는 못하나 남편감 후보가 많은 덕선에게 커다란 고민은 없다. 고학도 없다. 서울대학생 보라가 데모를 하지만 엄마의 눈물에 돌아와선 연하의 동생 친구와 목하 열애 중이다. 사회라는 큰 그릇에 담긴 채 소소한 일생을 살아가는 착한 아이들이다.

원래 젊은이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막나가는 존재들, 천둥벌거숭이 같은 존재 아닌가. “왜 학교를 안 가고 빈둥거리고 있느냐? 제발 철 좀 들어라. 왜 그렇게 버릇이 없느냐? 도대체 왜 글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냐? (기원전 1,700년경 수메르 점토판)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 부모에게 대들고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스승에게도 대든다”(기원전 425년경 소크라테스) 그리스의 고전 일리아드에는 “고대의 장수들은 혼자서도 가뿐히 돌을 들어 적에게 던졌지만 요즘 젊은이들 같으면 두명이서도 들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처럼 젊은이들은 늘 문제가 있다.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먹고사는 것에 대한 고민, 앞날에 대한 걱정을 잊고 추억으로 포장된 과거를 보면서 그저 따뜻한 말 한 마디에 감격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1988년에 18세를 보낸 쌍문동 다섯 아이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다가 미국에 사는 18세, 우리의 1.5세와 2세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미국은 9월달에 학교가 시작되므로 그 전후 생일이 언제인지에 따라 17~18살에 고등학교 졸업을 한다. 원래 이 나이는 낭랑(朗朗)18세라, 밝고 명랑한 젊음을 나타냈다.

그런데 부모의 선택아래 이민 온 아이들은 한국인인지 미국인인지 정체적 혼란에 시달리고 미국에서 태어난 2세들은 만 18세가 되는 해 3월까지 한국국적 이탈을 해야 남자아이 경우 병역의무를 벗는다.

그 외 1세와의 대화결핍, 집과 학교•사회와의 거리감, 영어와 한국어의 혼돈, 미국인과 한국인의 의식 차이 등등 그들의 어깨에 짊어진 짐이 안쓰럽다. 제 나이답게 웃고 행동해야 할 아이들의 고민과 방황이 깊다. 오늘도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무릇 부모 된 자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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