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두 곳의 다른 상황

2015-11-23 (월) 허병렬 (교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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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재미있는 사진이 또 있을까? 어떤 나라에 만연한 시험 부정행위를 보여주는 사진이다. 20명 가까운 학부모들이 5층에 있는 시험장을 향해 벽을 타고 올라가 ‘커닝 페이퍼’를 전하려는 모습은 마치 벽 기어오르기 경기장 같다. 그들은 이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을 것이다.

이번에는 한국 신문을 본다. 2016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위한 응원 모습의 가지가지가 소개됐다. 버스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 운행 횟수가 대폭 늘어난다. 경찰 8,000명이 출동한 특별 교통관리, 3,000여대의 차량을 동원한 긴급 이송, 듣기 평가 시간에는 자동차 경적을 못 올리고 항공기 통제까지… 시험일이라기보다는 국가 비상시를 연상하는 이 날은 아주 중요한 날이다.

시험장 입구 가까이에는 선배와 후배들이 모여서 수험생들을 격려한다. 그들이 준비한 커다란 현수막에는 ‘힘내라!’는 격려의 말이 쓰여 있다. 수험생들은 마치 일선으로 출격하는 전사처럼 씩씩하지만 약간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시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필자가 일하는 한국학교는 미국 고등학교의 2층을 40년 가까이 임차했었다. 그 학교는 매년 SAT 시험장으로 사용됐으며 가까이 사는 학생들이 7층에 모여든다. 수업 한 시간 전에 출근하는 필자가 교실을 정리하고 있으면, 극소수이긴 하지만 가끔 이런 수험생을 만나게 된다. “연필을 빌려 주시겠어요?” “아주 드려요. 시험 잘 보세요.” 이런 대화를 나눈 일이 몇 차례 있었다. 때로는 ‘계산기 갖고 계세요?’라는 질문도 받았다. 그 학생들이 이런 상태로 시험장에 왔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시험일에 그 가족들은 이런 수험생과 어떤 대화를 가졌을까?

수험생들은 시험일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걸어서 학교 문을 들어선다. 차편으로 왔더라도 학교가 보이는 곳에서 내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들에게서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없는 시험일이다. 그들 모두는 SAT 시험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의 일상생활인가? 아니면 대학 입시를 위한 중요한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한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이곳의 SAT는 같은 무게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처하는 모습이 전연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편이 학생을 도와주고 있을까?

자녀 사랑은 인간의 본능이다. 자녀의 미래가 밝기를 바라는 마음은 부모의 바람이다. 자녀의 성장을 돕고자 하는 부모의 염원은 뜨겁고 그 방법은 다양하다. 커닝 쪽지를 전달하려고 벽 타기를 하는가 하면 조용히 등을 쓰다듬으며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는 말만 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자녀의 입장에 선다. 부모가 너무 무관심하면 자녀가 강해지는 사례도 봤다. ‘나는 내 힘으로 살 수 밖에 없어. 부모님은 다른 일로 눈코 뜰 새가 없으시니까.’ ‘그러다가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하지?’ `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 의견을 듣지 뭐‥’
정반대의 사례도 있다.

부모가 학과목에 따라 공부하는 시간표를 작성하고 이에 따른 참고 자료를 준비하여 자녀의 복습예습을 돕는다. 수면시간, 영양관리, 학용품 준비까지 학부모가 관리한다. 학생은 부모의 시간표에 따른 학습 자료를 제공받고 공부한다. 그 학생은 무대 위에 서는 역할만 맡는 것이다.

이런 학생은 학과 성적이 좋더라도 무대 위의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가 맡은 모든 일은 그 학생이 배워야 하는 삶의 기술인 것이기 때문에, 시험 결과보다 값어치 있는 것의 훈련이 미숙하게 된다.

시험일 아침이다. “야아, 맛있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구나!” “오늘 좋은 날 기운 내라고…” 엄마와 아들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아빠, 잘 모르는 것이 있을까봐 걱정이에요” “그럴 때는 몇 차례 생각해봐야지. 아니면 내게 연락해라. 벽 타기를 해서라도 알려 주겠다” 이래서 모두 한바탕 웃는다. 각종 ‘시험’이 일생을 따라다니지만, 그것에 실패하더라도 살 길은 얼마든지 있다. 꼭 지나야 하는 과정일 뿐이다.

<허병렬 (교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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