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서재필 박사를 돌아본다

2015-11-14 (토) 김승도(대한민국 광복회 뉴욕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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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광복회에서는 매년 해외동포재단의 후원으로 동포1세 및 1.5세, 2세들을 대상으로 무료 서재필기념관 방문행사를 갖는다. 일제강점기 시절 많은 애국지사, 독립투사들이 계셨지만 자체기념관을 해외에 가진 분은 서재필 기념관 밖에 없어 다른 이국지사 숭모회에서는 매우 부러워하고 있다. 이 기념관은 박사님의 마지막 25년의 여생을 보낸 곳이며 또한 서가하신 곳이기 때문에 많은 의미와 역사적 가치 또한 크다.

서 박사님은 우리 한인들과 같이 이곳에 이민(망명)오셔서 많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 성공하시고 고초도 많이 겪으셨다. 1864년에 출생(지난해 탄생 150주년)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20세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개혁을 위한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3일만에 실패, 일본으로 도주 후 21세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우리와 같은 고난의 미국이민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교회에서 홀렌 백이란 부자자선가를 만나 필라쪽으로 와서 22살에 고등학교에 이어 야간의과대학을 다녀 28세 한인 최초의 양의사가 되고 30세에 미국인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 두 딸을 얻는다.


32세에 조선정부의 부름을 받아 11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민중교육과 신문제작(독립신문) 민중계몽운동에 주력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한다. 또 독립문을 세우고 청년, 민중들에게 대한제국, 러시아, 일본정부의 부당함을 성토하다가 다시 고국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46세 즈음 필라델피아 유수의 인쇄소로 성정하나 1919년 고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필라에서 이승만, 정한경과 같이 구미위원회를 결성, 초대위원장에 취임한 후 조국독립을 위해 온힘을 바친다.

1945년 대한민국이 해방되고 미군정이 시작되자 미군정장관 하지중장의 최고 고문겸 과도정부특별의정관으로 고국을 다시 찾아 해방후의 고국 안정과 민족통일을 위해 노력한다. 1951년 87세의 고령으로 고국에서 벌어진 한국전쟁의 소식을 접하고 눈물로 조국을 걱정하시며 생을 마감하셨다.

갑신정변에 실패하면서 신혼 2년차 태어난 아들을 비롯 부모 형제 처자 모두 역적으로 몰려 몰살당했다. 그런데도 박사님은 우매한 조국 백성들이 너무 불쌍했고 조국의 현실이 안타까워 11년만에 다시 찾아와 주변국의 속박으로부터 자주독립해야 한다는 열망을 부르짖지만 역부족으로 다시 조국에서 출국(추방)당해야 했다. 그런 박사님을 생각하면 그분의 나라사랑, 민족사랑, 독립자강의 정신을 지닌 그의 열정과 고귀한 정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이해하고 돌이켜보는 데는 직접 서재필박사 기념관을 방문하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은 없을 것 같다.

이 결실의 가을에 한 거인의 위대한 정신과 생애를 둘러보는 것도 광복70주년을 맞는 올해, 본인과 자녀들에게 무엇보다도 값진 결실의 가을이 될 줄로 믿는다.

<김승도(대한민국 광복회 뉴욕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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