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잔디 잔디, 금잔디

2015-11-14 (토) 김태진 <작가/리빙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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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도 잔디를 좋아하셨던 어머님이 어느 날 집 앞 담 모퉁이에서 골목을 돌아 나오는 오토바이에 치어 크게 다치셨다. 그리고 병원에서 몇 달간 치료를 받으셨는데 그 후로는 하루가 다르게 총기가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종국엔 치매기까지 시작되어 가족들의 애를 태웠다.

본래 치매란 완치가 불가능한 마지막 병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의사선생님도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권해 병세의 진행을 늦춰보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라고 하셨다.

나는 당장 앞마당의 연못을 메우고 관상수를 뽑아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잔디를 심고 텃밭도 만들어 드렸다. 그러자 어머님은 어린애처럼 좋아하시며 거의 온종일을 마당에 나와 시간을 보내셨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어머님이 달라지셨다. 이제껏 파랗던 잔디가 누렇게 변해버리자 어머님은 그렇게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다. 잔디가 모두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어머니, 잔디가 죽은 게 아니라 잠시 쉬는 거에요. 내년 봄이면 또 파랗게 새싹이 나오잖아요. 그동안에 어머님도 밖에 나가지 말고 방안에서 푹 쉬세요.”

그런데도 어머님은 파란 잔디가 죽은 것만을 애통해 하시며 그해 겨우 내내 누런 잔디밭을 내다보며 마음을 아파하셨다. 그래서 다음해에는 사시사철 파랗게 살아있는 양잔디를 어렵사리 구해 금잔디를 모두 걷어내고 대신 심어놓았다.

그러자 어머님은 이제 텃밭 보다는 잔디밭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시는 것 같았다. 잔디밭에 있는 잡초를 캐내기 위해 그러신다고 했는데 뜻밖에도 그런 어머님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예 잔디가 모두 송두리째 뽑혀져버린 맨땅이어서 깜짝 놀랐다.

“어머니, 왜 그렇게 잔디를 몽땅 뽑아버리세요?” 그러나 어머님은 잔디를 뽑은 것이 아니라 잡초를 뽑았다고 우기셨다. 알고 보니 기존의 금잔디에 비해 잎이 가늘고 부드러운 양잔디를 어머님은 잡초로 생각하고 몽땅 뽑아버리신 것이다.

“어머님 이건 잡초가 아니라 잔디에요. 사철 죽지 않는 양잔디…”
그래도 어머님은 막무가내로 잔디를 모두 뽑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못해 잔디밭에 앉아계시는 어머님을 불끈 들어 텃밭으로 옮겨 드리고 그곳의 잡초나 뽑으라고 했지만 회사에서 퇴근하여 돌아와 보면 여전히 잔디밭에서 잔디를 뽑고 계셨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그 예쁜 잔디밭이 듬성듬성 맨땅이 불거져 나와 여간 흉한 게 아니었다.

무척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님은 여전히 땡볕에 앉아 잔디를 뽑고 계셨는데 이제는 그 뽑힌 자리가 엄청났다. 나는 가방을 내팽개치고 어머님에게 달려들어 손에 들려있는 호미를 비틀어 빼앗아 버렸다.

“아얏, 아퍼ㅡ” 나의 갑작스런 완력에 순간 어머님의 손가락이 뒤틀렸나보다. 금방 울듯 한 어머님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는데 그런 어머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은 쿵하고 내려앉았다. 그리고 엄청난 후회가 몰아쳐왔다.

어머님은 화가 나서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셨고 다시는 잔디밭으로 나오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후로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어머님은 하늘나라로 떠나가셨다. …그리고 나도 다시는 앞마당에 잔디를 심지 않았다.

<김태진 <작가/리빙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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