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금은 ‘서양역사 시간’이다

2015-11-09 (월) 허병렬 (교육가)
크게 작게
위트(wit)가 있는 사람은 보물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도 예를 든 일이 있지만 해방 직후의 이야기라고 기억한다. 대중 앞에는 통역이 있을 때다. “여러분 하여튼 크게 웃어 주세요. 이 분이 분명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듯하지만, 저는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대중이 한바탕 웃었고, 당시의 연사는 크게 만족하였으며, 명통역사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또하나 재미있는 이야기도 기억한다. 여기는 고등학교이고, 창밖 큰길에서는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데모가 한창이었다고. 그 때 한 학생이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저 데모에 관한 의견을 들려 주십시오.”듣고 있던 학생들이 손뼉을 치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 교사는 큰 기침을 하고 나서 분명하게 말하였다. “학생들, 지금은 서양역사 시간입니다.” 교실 안에는 웃음꽃이 피었고, 그 교사는 난처한 처지를 위트로 유유히 모면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티한 사람이 사랑을 받는다.

이번에는 다르다. 현재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정 역사책’파문은 그 차원이 달라서 여기서도 무심히 지낼 수 없지 않을까? 우선 우리는 왜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것일까? 역사는 우리들이, 아니 내 자신이 어떻게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인가를 찾는 학문이라고 하겠다. 왜 그것이 필요한가? 현재를 현명하게 살고, 밝은 미래를 찾기 위한 밑거름이 바로 역사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좋은 소식이 들린다. 한참 시끄럽던 ‘국정 역사교과서’ 파문이 해결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어른들이 아닌, 전국 중^고등학생 단체가 그 일을 하였다는 이야기다. 결론은 이렇다. 『새로 나온다는 국정 역사교과서와, 과거의 검인정 역사 교과서 중에서 우리 스스로 사용할 교과서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선택이 그럴 듯하기 때문에 어른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국정 역사교과서’ 파문을 가라앉힌 것은 ‘검인정 역사교과서’의 해석이다. 이것은 교육부에서 실시하는 교과서 사열 과정에서의 검정과 인정을 받은 교과서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은 실패였다.’ 한마디로 역사 교과서 파문이 일어났다면, 그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그것은 실패였다’는 이 한마디로 물러설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번에도 그 책들은 선택권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번에는 야당이 소리친다. ‘국정 역사책’은 선택권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학생들이 점잖게 대꾸한다. “그것은 무리다. 정부의 입장도 세워야 하지 않겠나?”떠들던 어른들이 입을 다물었다. 결국은 그동안 시끄럽던‘국정 역사책’파문이 가라앉았고, 교사와 학생들에게 역사책의 종류가 늘어서 선택권이 넓어졌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필자의 한낱 꿈이었다. 한국내의 어지러운 모습과 크고 작은 말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다.

하지만 ‘국정 한국역사’ 찬반의 두 편에서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 그것은 역사를 담당할 일선 교사들의 의향이다. 어떤 역사교과서를 사용하든지, 그들의 강의는 중요한 뜻을 가진다. 따라서 그 교사들의 의견을 한 방향으로 잡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그들의 생각은 젊고, 후세교육의 열정은 뜨겁다. 다양한 장점을 가진 각종 한국역사책 중에서 교재를 선택할 수 있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이것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들이 지금은 조용히 제자리를 지켜서 고맙다.

어떤 문제에 대한 여러 각도의 토의는 긍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이 끝없이 이어지는 억지일 때는 사회의 경종이 필요하다. 이성을 잃고 달리는 두 단체는 공격을 멈추고, 지금은 보다 나은 선택을 할 때다.

“요즈음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유럽에서는 민족 이동문제가 벌어지고 있어요. 자국 내의 문제, 국제 간의 문제가 얼키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우리는 멀리 있지만 결코 무관심할 수 없어요.” 역사교사의 말을 듣고 있던 학생들이 합창을 한다. “선생님, 지금은 한국역사 시간이에요.”

<허병렬 (교육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