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연과 필연

2015-11-07 (토) 김명욱<객원논설위원>
크게 작게
신학교 다닐 때 흑인 교수가 강의 중에 자기 가족 스토리를 얘기한 것이 지금도 생각난다. 아들이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달렸다. 앞에는 트레일러가 가고 있었다. 아들은 그대로 트레일러를 따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트레일러가 본체 자동차 머리에서 떨어져 나와 아들이 뒤따라 타고 가던 자동차를 덮쳐 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들은 미쳐 피할 사이도 없었다. 그대로 덮쳐진 아들 자동차는 풍비박산이 났다. 병원으로 옮겨진 아들은 생명은 살았다. 하지만 평생 불구로 살아가야 하는 장애인이 되었다. 교수는 아들의 이 사고가 우연히 일어난 것인가, 필연인가란 질문을 던졌다. 그러며 트레일러 뒤는 절대 따라가지 말라고 했다.
잘 아는 목사가 있다. 이 분이 어머니를 뒤에 모시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1차선으로 달리고 있었는데 자동차가 오래된 것이라 갑자기 멈추어 서 버렸다. 시동기 꺼진 거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가 멈출 사이도 없이 앞에 정차된 자동차를 박고 말았다. 뒤에 탔던 목사의 어머니는 이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슬픈 일이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린 우연적인 필연, 필연적인 우연의 순간들을 많이 만날 때가 있다. 특히 자동차 사고일 경우 “왜, 하필이면 그 때, 그 장소에 내 자동차가 가다가 사고를 당했을까. 순간적인 찰나의 1초만 지나거나 아님, 못 미쳤다면 내가 사고의 장본인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1초, 따깍하는 순간이다.


196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네(Jacques L. Monod)는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다란 말을 했다. 그러며 그는 우연의 시작에선 어떤 목적이 존재하지 않음을 시사했다. 목적 없이 일어나고 있는 우연의 앞과 뒤에 목적이 있다면 그건 신학에서 말하는 예정론이 된다.

예정론(predestination). 말 그대로 이미 설정된 목적에 의해 사물이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목적이 관계된 설정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 된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삶이란 수순대로 밟아온 것 아닌가 하는 신기함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긴 사람들에겐 그것이 우연이 아닌 어떤 목적성에 가까움을 본다.

그렇다면 태어남 그 자체는 목적성이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만남과 결합.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생명엔 분명한 목적성이 내재돼 있다. 사랑의 산물로 태어난 아기이기에 그렇다. 이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하지만 강도가 강간하여 생겨진 생명체에게는 어떤 목적성이 있을까. 이것도 예정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신학(神學)의 난제(難題)중 하나가 이런 질문이다. 또 있다. 왜,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변을 당하고 일찍 죽는가? 이다. 반면, 고리대금과 가진 변칙으로 악랄하게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떵떵거리면서 잘 살아가고 있는가? 이다. 선한고 착한 사람들의 죽음은 우연인가. 악이 왜 존재하는가. 악의 존재, 목적성인가.

선과 악의 공존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자크 모네의 말처럼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우연과 필연의 열매라면 선과 악의 공존도 우연과 필연의 열매라 할 수 있을까. 불교에 보면 연기설(緣起說)이란 게 있다. 모든 게 다 인과(因果)의 법칙을 따라 발생한다는 설이다. 인과란 원인과 결과다. 결과는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

목적 없는 필연은 없고 목적 있는 우연은 없다. 삶은 인과요 죽음은 예정이다. 예정 속의 예정은 부활(復活)이요 해탈(解脫)이다. 어제가 있으면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으면 내일이 있다. 시간은 인과 된 예정이요 소망이다. 우연과 필연은 동전의 양면 같은 한 몸이 아닐까.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event)이기에 그렇다.

<김명욱<객원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